[소리가 만난 사람]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 살아가는 학사와의 인터뷰
좌충우돌 하 목사의 공동체 예찬론(1)
부산지방회의 이사이자 목회자로 사역하시는 하창완 학사님(부산대82)을 만났습니다. 학사님은 IVF묵상지 <시냇가에 심은 나무>를 활용하여 묵상 팟캐스트 방송도 하시는데요. 다양한 영역에서 여전히 즐겁게 IVF 활동을 하시는 학사님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인터뷰 현장에 문춘근 학사님(부산대83)도 동참해 주셨습니다. (진행 이시종/정리 편집부)
이시종(이하 종) 개인적으로 학사님을 지성근 간사님(IVF일상생활사역연구소 소장)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먼저 일명 “문지하 모임”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하창완(이하 하) 1984년에 부산지역에 IVF가 개척되었습니다. 먼저 지성근 형제가 IVF에 가입했고 문춘근 형제가 6월에, 저는 9월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인연이 시작됐죠. 이른바 “문.지.하.”가 결성된 겁니다. 성근 형제는 졸업 후 바로 신대원에 갔고 저와 춘근 형제는 캠퍼스에 남았어요. 이때부터 저와 춘근 형제는 각별한 사이가 되었고요. 다른 두 사람은 간사로 활동했고 저는 학사의 삶을 살았어요. 그리고 우리 세 명 모두 IVF 커플로 만나 결혼했습니다. 공통점이 많죠?
본격적으로 우리가 만나기 시작한 건 세 사람 모두 교회를 개척한 마흔 중반쯤이었어요. 저는 부교역자로 교회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두 사람은 간사사역과 유학생활을 했죠. 그렇게 각자 살다가 동종업계(?)에 종사하면서 지속적으로 만나게 된 거죠. 앞으로 꾸준히 만나자는 이야기가 나온 건, 지 목사의 결혼 20주년 여행이 계기가 되었어요. 결혼 20주년에 부부끼리 놀러 가면 뭐 하냐, 우리도 들러리로 끼자, 뭐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다 같이 문경에 놀러간 거죠. 지 목사, 문 목사 그리고 저, 결혼날짜가 1년씩 차이가 나요.
문춘근(이하 문) 그런 식으로 해서 2년 쉬고 25주년 기념하는 여행을 해마다 다녀오고, 또 2년 쉬면 30주년 기념 여행을 하는 거죠. (웃음)
하 그뿐 아니라 세 사람 모두 교회를 개척하다 보니 교회에서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었고, 서로 힘든 이야기를 나눴어요. 신기하게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나면 문제가 풀어지기도 하고 일이 정리되기도 했어요. 아무래도 목회자들은 신학교 동기라 하더라도 같은 교단에 속해 있으면 속이야기를 못하는데, 우리끼리는 가장 깊은 부분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었죠. 갑자기 주일 밤에 만나 새벽 서너 시까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요. 아내들이 갱년기를 겪을 때도 서로 위로하고 격려했죠. 부부간에 다툼이 있으면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녀 문제로 고민할 때는 서로 보듬어주고요. 그러면서 격의 없는 만남이 되었어요.
이 모든 건 IVF라는 공통분모가 있어서 가능했어요. 캠퍼스 시절 아무 사심 없이 만났던 우정이 있고 신앙의 컬러나 비전도 동일하니까요. 게다가 부부 모두 같은 비전을 공유하고 있으니 말이 잘 통하죠. 서로가 서로에게 격려가 되고요. 특히 지 목사가 일상사역에 대해 나누며 교회가 가야 할 방향을 도전하기도 했고요. 문 목사와 저는 순진하게도 그걸 그대로 받아들여 시도했죠. (웃음) 교회라는 일터 속에서도 함께 고민하고 이것저것 실험했어요.
문 서로 흩어져 지내다가 어느 샌가 세 사람 모두 부산에 돌아와 있었어요. 부산지역에 대한 애정이 저희 모두에게 있더라고요. 학생 때 캠퍼스에 대한 교감을 나누었던 것처럼 우리가 사는 동네에 대한 비전을 나눌 수 있었죠. 이렇게 같이 놀다가 은퇴하고 난 후에 부산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따로 사는 게 좋을지, 같이 살면서 분담하며 지내는 게 좋을지, 그렇게 하면 우리가 뭘 할 수 있을지 고민해요.
이번 인터뷰 자리에 함께한 세 사람. 왼쪽부터 문춘근, 이시종, 하창완.
종 굉장히 부럽네요. 사실 목회자들이 우정을 나누는 관계를 맺기가 쉽지 않고 학사들도 40대 중후반을 넘어가면 맘을 터놓을 곳이 없어요. 오랜 우정을 유지하시는 비결이라도 있을까요?
문 비전만을 위해서 만나는 관계가 아니라 학생 때부터 만났기에 가능했죠. 각 가정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만나니까 그게 오랜 우정의 기초가 된 것 같아요.
종 게다가 모두 캠퍼스 커플들이시니 서로 서로 잘 아시죠.
문 그렇죠. 남편들끼리만 재밌는 게 아니고, 선후배 사이였던 아내들끼리도 서로 편해요. 교제하던 시절부터 서로 다독이던 관계니까요. 뿐만 아니라 저희가 대형교회를 섬기지 않은 게 이런 여유를 나눌 수 있는 이유인 것 같아요. 만약 우리 중 한 사람이라도 교회의 규모가 커지거나 유명해지면 편하게 만나기 어려울 것 같아요.
하 우리가 IVF에서 공동체를 경험하고 자라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아요. 교회가 커지는 걸 막을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작은 교회의 공동체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우리끼리 먼저 그런 공동체를 만드는 거죠. 후배들 중에도 저희 영향을 받아 모이는 그룹이 있더군요. 제 경험상 이런 관계가 특히 남자들에게 좋아요. 평균수명이 길어졌으니 앞으로는 친구가 곁에 남겠죠.
종 듣다 보니 학사님의 캠퍼스 연애 시절 이야기가 무척 궁금해지네요. (웃음)
하 제가 리더였던 4학년 때 아내는 2학년이었어요. 동아리방에서 처음 만났는데 환하게 웃는 모습이 너무 좋았어요. 전 아내가 속했던 소그룹 셀코디네이터였어요. 6개월 정도 지켜봤죠. 제가 개척멤버에 리더이다 보니 교제를 하는 게 조심스러웠어요. 졸업 후에 고백해야겠다 생각했죠. 다만 춘근 형제에게는 미리 마음을 털어놓았어요. 그랬더니 자기가 도와주겠다면서 2학기에 제가 맡은 소그룹에 자매를 편성해 주더라고요. 평소에도 제가 후배들에게 이성교제에 대해 말할 때면 권력이 있을 때 남용하라고 이야기하긴 했습니다. (웃음)
그렇게 같은 소그룹에서 한 학기를 지내고 이래저래 함께하는 시간을 만들어갔는데, 육감이 뛰어난 자매들이 제 마음을 알아차렸나 봅니다. 하루는 후배 리더가 와서, 오빠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나있다는 거예요. 괜히 소문만 무성하면 서로 더 힘들어질 수 있으니 자매에게 고백을 하기로 결심하고 학교 앞 커피숍에서 만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아내는 예상을 하고 ‘no’라는 대답을 준비해왔었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그런데 제가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라 둘 다에게 관련된 일이라면 두 사람 모두에게 응답을 주시지 한 사람에게만 주시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자매를 향한 이런 마음을 하나님 앞에 아뢰어왔으니 자매도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어요. 그리고 자매를 향한 기도를 적은 큐티 노트를 보여주었죠. 그랬더니 형제가 6개월 동안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서 고민해온 걸 내가 뭐라고 바로 거절할 수 있겠냐는 마음이 들었다고 하더군요. 자매는 3개월 정도 기도하더니 ‘yes’를 했습니다. 이 시기 동안에도 여전히 저는 리더이고 자매는 멤버였으니까 재밌는 에피소드가 많았습니다. (웃음) 다른 멤버들이 눈치 채지 않게 데이트하는 것도 힘들었고요. 졸업 즈음 본격적으로 사귀기로 했죠. 저는 졸업 후에 교사생활을 1년 반 정도 하다가 전교조를 결성했습니다. 해직위기가 있었는데도 자매가 제 활동에 흔쾌히 동의를 해주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아무것도 모르고 동의한 것 같긴 해요. (웃음) 어쨌든 자매는 제게 하나님나라의 길을 걷는 오빠를 지지한다고 말했죠.
종 저도 들었던 목사님의 일화 중 전교조에서 생활하시던 때가 인상 깊었습니다. 그때의 이야기를 해주세요.
하 사실 대학 4학년 때 진로를 두고 기도하는데 간사를 하고 싶었어요. 당시 부산지방회를 도와주시던 박영덕 간사님을 찾아뵙고 이런 제 뜻을 말씀드렸더니 굉장히 고민하시다 안 된다는 거예요. 제가 간사를 하면 그 지부에 남자들만 남을 거라고요. (웃음) 사실 그랬어요. 제가 그때 굉장히 직설적이었고 거칠었어요. 문춘근 목사가 옆에서 제게 상처받은 자매들을 다독거려줬고요. 그래도 간사가 될 방법이 없냐고 여쭈었더니 6개월 정도 하루에 4시간씩 큐티를 하라는 거예요. (웃음) 그래서 순진하게 그대로 했죠. 그런데 네 시간씩 큐티를 하니까 사람이 바뀌더라고요. 예를 들어 자매들에게 아주 직접적으로 이야기해야 할 것도 하나님이 큐티 중에 너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사인도 주셨고요. 바꾸어 표현하는 연습을 해보면서 굉장히 부드러워지더라고요. 그런 후에 하나님이 선물로 지금의 아내를 주셨죠.
그러던 중에 교직 실습을 나갔는데 학교가 제 적성에도 맞고 굉장히 좋더라고요. 그래서 간사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고 학사로서 살기로 했어요. 제가 4학년이던 1987년, ‘6월항쟁’이 있었어요. 그때 저는 거리에 나가 독재타도를 외쳤고 일부 다른 멤버들은 이것을 위해 기도했어요. 당시 부산은 광장에 참여하는 것과 기도로 중보하는 것이 하나가 되는 분위기였어요. 그래서 서로 든든한 지지와 격려를 받았죠. 그런 6월항쟁의 경험이 저에게 큰 울림이 되었죠. 졸업 후 제가 교사로 나갔던 현장은 지금과는 상황이 많이 달랐습니다. 인문계 고등학교의 한 반에 아이들이 50명 정도였는데 그중 4년제 대학에 갈 수 있는 아이는 열대여섯 명 정도였어요. 나머지는 들러리였죠.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형상인 아이들의 재능을 어떻게 각각 개발하고 도울 수 있을지 고민하며 나름대로 인격적인 만남을 시도했죠. 국어교사라서 아이들의 인격과 만날 수 있는 여지가 많았어요. 특히, 제가 있었던 학교에 젊은 교사가 많았는데, YMCA 중등교사 협의회에서 교사민주화운동을 주도하셨던 분들도 계셨고요. 그분들과 스터디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교육 현장에 대한 고민을 나누게 되었죠. 그게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 발기로 이어졌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보수적 기독교, 특히 복음주의권 안에서는 이런 진보적 운동을 하기가 쉽진 않았어요. 그래도 IVF 선배들, 특히 권영석 총무님을 만나 뵈었을 때 많은 격려를 해주셨어요. 무엇보다 캠퍼스에 같이 있던 친구들과 문 목사가 지지를 해주었죠.
이렇게 지지와 격려를 받으며 전교조에 가입을 했는데 정부는 빨갱이라는 색깔론으로 교사들을 해직했어요. 당시 1,500명이 해직이 되었고 우리는 명동성당에서 단식 농성을 했죠. 저는 하나님 앞에서 금식기도를 한다는 마음으로 단식을 했고 하나님은 이사야서를 통해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해직을 당한다면 받아들이겠다고 결심을 했어요. 저희 학교에서는 다섯 명이나 해직되었어요. 전교조 교사들을 보면 성향이 다양해요. 진보적인 생각으로 사회운동을 하던 사람도 있고 휴머니스트들도 있고요. 저처럼 신앙적 동기를 가진 사람도 많았어요. 그런데 신앙적 동기로 참여했던 분들은 교회에서 어려웠죠. 저도 마찬가지로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
그때 IVF 후배들이 형을 보면 힘이 난다고 격려하며 후원금을 보내주어서 감동을 받았어요. 그러면서 하나님나라를 살아가는 게 이런 거구나 실감했어요. 이렇게 후배와 동기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막상 현장에서 부딪히는 경험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더라고요. 이럴 때 제게 도움을 주셨던 분이 이문식 목사님이었어요. 복음주의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진보적인 운동을 하셨던 분이라 직접 찾아뵙고 멘토로 삼아 많은 도움을 얻었습니다. 점점 마음도 강해졌어요.
한편 현장의 역동이 참 묘하더라고요. 삶이 치열할수록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놓칠 가능성이 많아요. 내가 하는 일이 누가 봐도 옳다는 지지를 받을 때일수록 더 그렇더라고요. 오히려 마음이 피폐해지고 내가 옳다는 명분만 남아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만남에 소홀하게 되었죠. 특히 무장해제하고 만나는 자매와의 교제 속에서 제 본모습이 드러났고 갈등이 생기면서 결국 자매가 헤어지자고 하더라고요. 하나님 앞에서 바른 영성을 회복하고 나서야 자매와의 사귐도 회복하라 수가 있었습니다.
이건 일반화할 수는 없는 이야기인데, 이때 신비한 체험을 여러 번 했어요. 전교조 활동을 할 때 갑자기 눈이 안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병원에 가니 ‘망막박리’라더군요. 망막이라는 필름의 코팅이 떨어지는 것인데, 실명직전까지 갔어요. 수술을 받고 절대 안정하라고 해서 몇 개월을 집에서 쉬다가 또 다시 전교조에 나가서 열심히 데모하러 다녔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무릎이 아파서 병원에 가니 무릎 양쪽의 연골이 모두 파열되었더라고요. 아마도 쉬는 동안 늘어난 몸무게로 뛰어다녔으니 일어난 일이겠죠. 지금과는 달리 그때는 인공관절로 바꾸는 게 쉽지 않았고 비용도 상당했어요. 굉장히 가난했던 저는 엄두가 나지 않았죠. 거기다가 인공관절 수명이 15년밖에 안된다는데 앞으로 살아야 하는 날이 창창한데 계속 수술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요. 교회에 가서 일주일간 금식하며 기도했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나님이 고쳐주셨어요. 하나님이 은혜로 고쳐주셨으니 감사하며 다시 열심히 전교조 활동을 시작했죠. 그러나 이번에는 아버지에게 교통사고가 났어요. 가정경제는 아버지 혼자 책임지시던 때였어요. 아버지 대신 장남인 제가 트럭 몰고 물건을 배달하는 일을 1년 동안 했어요. 아버지가 나으신 후 다시 전교조로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자매가 저와 헤어지자는 거였죠. 그 상처를 안고 다시 기도원에서 일주일간 금식기도를 했어요. 이때 그간 적어놓은 큐티노트를 가져가 제 인생 전반을 돌아보는데, 하나님이 저를 풀타임 사역자로 부르신다는 사인을 곳곳에서 발견했죠.
마음에 깊은 평화를 되찾았어요. 교회 목사님도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계셨다고 격려하시더군요. 신기하게도 자매도 돌아왔죠. 저에게는 IVF에 대한 마음의 빚이 늘 있으니 간사와 신학대학원 진학 사이에서 고민했어요. 하지만 1992년 당시 6개대사태 직후라 제가 간사로 사역하긴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이문식 목사님은 제가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사람이니까 가장 보수적인 고신 신대원에서 살아보라고 조언하셨어요. 그렇게 해서 고신 신대원에 진학했죠. 이렇게 신대원에 진학하고 그 사이 무려 6년의 연애 끝에 결혼도 했어요. 그러면서 4년 동안 CLF 협동간사도 했죠.
김영삼 정부에서 전교조 해직 교사를 복직시킨 적이 있었는데, 그때 진짜 다시 가고 싶은 거예요. (웃음) 그래서 하나님과 씨름을 했죠. 한 달간 기도한 후에 1년만 다녀오겠다고 선언을 해버렸어요. 제 말을 듣던 아내는 이 길이 아니라며 나는 거기서 빠지겠다고 화를 내더라고요. 그날 새벽, 김해공항으로 누구를 모시러 가야 해서 혼자 나갔어요. 2차선 도로로 가고 있었는데 골목에서 갑자기 승용차 한 대가 튀어나오더니 제 승합차를 들이받은 거예요. 차가 몇 바퀴를 구르더니 뒤집힌 채로 끌려갔어요. 딱 감이 왔어요. 하나님, 복직하지 않고 복학하겠습니다! (웃음) 그랬더니 바로 또 차가 섰어요. 하나도 안 다쳤고요. 하나님이 꼼짝 말라고 이야기하신 거죠. 그래서 복직 대신 복학을 하고 그때부터는 흔들리지 않고 목회의 길을 달려왔습니다.
1989년에 부산에서 학사수련회가 열렸어요. TCF가 막 만들어지던 때였죠. 저는 해직 통보 후 명동에서 단식을 끝내고 내려온 직후였고요. 그리스도인 동료 교사들이 현장에서 해직당하는 아픔 속에 있는데 우리가 논의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현장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수련회에서 피케팅도 했는데, 돌아보면 참 부끄러워요. 기독운동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성숙해져서 큰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막 태동 단계에 있던 TCF를 저의 현장 경험으로 몰아붙여서 에너지를 분산시킨 건 잘못이었어요. 제가 그때 좀 더 성숙했더라면 그들을 지지하고 격려해주었겠죠. 그리고 나와 동료 교사들을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겸손하게 요청하는 게 바람직했는데 말예요. 그때는 좌충우돌하던 시기였어요.
* '좌충우돌 하 목사의 공동체 예찬론(2)'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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