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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F/IVP

[시심 9월호 영혼의 창] 누구나 나름 빠지는 것이 있다 - 한병선

누구나 나름 빠지는 것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나름대로 빠지는 것이 있다.

 

내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한창 하이틴로맨스 장르에 빠져 오만 가지 하이틴 로맨스를 다 읽었다.

내용은 늘 뻔했다. 평범한 여자가 정말 멋진 남자를 만났는데 그 남자가 자기만 좋아하게 되어 그 여자가 인생의 여주인공이 되는 과정, 그 속에 마음 설레는 약간의 스킨십 같은 것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늘 뻔했지만 벗어나기 힘들었다. 눈 감아도 알 수 있는 내용들인데도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20대에는 무협지에 빠져 허우적댔다. 이것 역시 내용은 뻔했지만 그 간질거림이 좋아서 계속 읽었다. 내용을 모두 섭렵할 때쯤 바쁜 일이 생기면서 중독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렇게 우리를 간질거리고 살짝 흥분시키는 것들은 주위에 너무도 많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울 때는 드라마에 빠져 살았다. 드라마 하나가 시작되면 끝이 날 때까지 본방을 사수했다. 드라마가 내 연인이 되었고 나는 거기에서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리고 지금……. 매일이 바쁘고 할 일이 많다. 그렇다고 중독에 빠지지 않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다만 매체를 이전과는 확연히 다르게 사용하려고 한다.

 


지금은 쓸데없이 버리는 시간을 없애고자 TV도 없애고, 내게 필요한 것만 다운받아 둔다. 정말 보고 싶은 드라마가 있으면 2~3일 여유를 갖고 폭풍시청을 한다. 이렇게 드라마를 한꺼번에 보고 끝을 냈다. 그렇게 하면 내가 어떤 무언가에 지배당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내 나름의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잘 때를 보면 나 역시 별로 필요 없어도 그냥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낸다. 한두 시간이 훌쩍 지나서 해야 될 일도 못하고 시간을 버리는 경우도 종종 생겼다.

 


시간은 늘 한정되어 있고 우리는 유혹에 약하다. 그리고 우리를 유혹하는 것은 너무도 내 가까이에 있다.
생각을 해봤다. 왜 이런 본능에 호소하는, 쓸데없는 것들에 내가 쉽게 넘어가는가? 나는 왜 이렇게 내게 즉각적 흥미와 간지러움을 주는 것에 쉽게 반응할까. 아마 성경을 읽는 데 이만한 열심을 냈다면 성자가 되었을 것이다. 아주 감각적인 편리함이 우리를 끝없이 끌어당기고 있다.

 

 


우리는 뚜렷한 목표가 없는 시간을 ‘버리는’ 시간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목표가 있는 시간은 그것을 하고 나서 여유를 가지거나 하지만, 목표가 없는 시간은 그냥 흘려보내고 탐닉해도 별 죄책감이 들지 않는 시간이다. 그래서 늘 시간을 의식해야 한다. 내가 지금 어떤 시간을 쓰고 있는지 의식하지 않으면 본능에 먹혀버린다.

 


시간은 무형이지만 어떤 돈보다도, 어떤 자산보다도 가장 비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하철을 탈 때마다 정한다. 그 시간에 뭔가를 하겠다고. 책을 읽거나 스케줄을 정리하거나 ‘지하철에서는 휴대폰을 보지 않고, 대신 생각을 하겠다.’ 등등을 정하고 지하철을 탄다. 본능적으로 하는 것들이 더 이상 나를 지배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내 나름의 철학이나 방법이 많이 필요해진다.
그래서 자신의 육체를 쳐서 복종시킨다는 성경이 나에게 많이 다가온다. 

 

 


버려지는 시간은 쉽지만, 만들어지는 시간에는 의지가 필요하다. 이제는 이곳저곳을 서핑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 의미 없이 감각적인 것에 몰입하는 것, 그것이 사실 내 자산이 될까 두렵다.

 

 

한병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