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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사람] 소리이음

[소리가 만난 사람] <소리>를 떠나며, 그동안 감사했습니다!_김경아

[소리] 2018년 여섯번째 소리 - 12+01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소리가 만난 사람>


<소리>를 떠나며,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김경아 ◆ 연세대 88



<소리> 편집간사로 사역하며 학사들의 마음을 풍성하게 채워주었던 김경아 간사님을 만났습니다. 

간사님은 입양을 소재로 한 『너라는 우주를 만나(IVP)』를 집필한 작가이자 성교육 강사이기도 합니다. 

입양과 자녀양육, 성, 여성의 삶, 질병과 죽음 같은 인생의 문제와 끊임없이 씨름해온 김경아 간사님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 <소리> 독자들에게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연세대학교 88학번 김경아입니다. 올해로 결혼한 지 25년이 되었고 희연, 희수, 희은 세 딸의 엄마에요. <소리> 편집간사이자 ‘진로와소명연구소’ 소속의 성교육 강사이기도 합니다. 2011년부터 8년째 <소리>에 실릴 글을 글답게 만지고 교정·교열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먼저, IVF와 어떻게 만났는지 들려주세요. 학부 시절은 어떻게 보내셨나요?


IVF라는 선교단체를 알게 된 건 고3때에요. 대학 합격 사실을 알고 나서 교회언니가 다니는 대학의 기독학생 모임에 따라갔어요. 거기서 어느 분이 제게 “연세대에 가면 IVF를 하면 되겠다”고 하셨어요. 그때 IVF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죠. 1980년대에는 ‘문무대’라고 해서 남학생들이 일주일간 병역집체교육을 받았는데, 남자애들이 다 문무대에 가서 수업이 없었던 저는 교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IVF 동아리방을 발견했어요. ‘여기가 IVF구나’하고 혼잣말을 하고 있는데, 제 등 뒤에서 누군가 “들어가세요”라고 하는 거예요. 그 사람이 지금의 남편인 김종호였어요(웃음). 이런 걸 하나님의 섭리하고 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웃음). 다른 사람이었으면 제 성격상 “됐습니다, 괜찮아요, 다음에 올게요”하고 완곡하게 거절했을 텐데, 서로 소개를 하다 보니 글쎄, 김종호가 행정학과 선배인 거예요. 결국 선배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동아리방에 들어갔던 게 지금까지 IVF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였어요. 


저의 대학 생활은 다른 대학생들과 사뭇 달랐어요. 1학년 가을에 이유를 알 수 없이 오래 앓다가 결국 ‘류마티즘 관절염’ 진단을 받았어요. 벌써 30년이나 됐네요. 당시에는 이 병이 무슨 병인지도 잘 몰랐고 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었어요. 그래서 학부시절은 대체로 아프면서 보냈습니다. 겨우겨우 수업을 들으러 다녔어요. 통증 속에 잠이 들고 통증 때문에 일어나야 했던, 죽지 않으니 마지못해 살았던 시간이었죠. 그때부터 지금까지 병으로 인해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었어요. 지금도 여전히 약을 먹으면서 살고 있어요. 그래서인지 고통과 질병과 죽음 등에 관심이 많았던 거 같아요. 그런 와중에도 IVF 활동하면서 좋은 사람들을 만난 게 큰 복이었어요. 아, 그리고 그 시기는 많은 연애를 했다가 실패를 거듭한 시기이기도 했네요(웃음).  



 많은 연애에 실패했다고 하시니 김종호 간사님과의 연애 이야기도 궁금합니다(웃음).


저는 고등학교 1, 2학년쯤부터 거의 끊임없이 연애를 했어요. 연애가 깨질 때마다 공동체에서 믿고 의지하던 ‘종호오빠’를 찾아가서 펑펑 울곤 했죠(웃음). 마지막 연애마저 처참하게 끝나자, ‘나는 왜 이렇게 계속 남자를 찾을까, 그리고 왜 계속 잘 안될까’ 묻기 시작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저는 가정폭력이 있고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는, 깨어진 가정에서 자란 취약한 아이였어요. 자존감도 낮았고 끊임없이 집밖에서 나를 보호해줄 누군가, 내가 의존할 누군가를 찾았던 것 같아요. 제 생각에 저는 독신으로 멋있게 늙어갈 사람은 아니라서 결혼은 해야겠더라고요. 처참하게 실패를 하고 나서 그럼 나는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하나 고민하게 된 거죠. 


자체적으로 특새(특별새벽기도)를 했어요. 하나님 앞에서 굉장히 많이 울면서 배우자 기도를 했어요. 이건 ‘믿거나 말거나’인데요, 그때 “김종호”라는 음성이 들렸어요! 진짜예요(웃음). 기도하면서 남편이 떠올랐는데, ‘종호오빠? 혹시 이 사람이라면?’하는 마음이 들었던 거죠. 저는 오빠를 멋진 선배로 좋아했어요. 이성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마지막 학기에 같이 리더를 하면서 제가 오빠를 선배 이상으로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1991년 10월 26일, 제가 일을 저질렀어요. 오빠에게 사랑을 고백한 거예요. 눈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좋아한다고 말했죠. 사실 이 고백이 있기 두 달 전쯤, 저는 오빠에게 양희은 씨의 “알고 있나요”라는 곡을 꼭 들어보라고 했어요. 짝사랑하는 사람의 애달픈 마음을 섬세하게 그려낸 노래거든요. 근데 제가 고백하자마자 이 오빠의 첫 마디가, “경아야, 나 그 노래 들었어.” 이러더라고요. 저는 너무 깜짝 놀랐어요. 오빠는 제가 그 노래를 추천한 바로 그날, 우연히 그 곡이 수록된 테이프를 가판대에서 발견했고 당장 사서 들었다고 합디다. 그후로 제가 고백할 때까지 두 달 동안 모른 척을 한 거예요. 진짜 너무하지 않아요?(웃음) 아무튼 그렇게 그 오빠는 제 고백을 받아주었고 2년 후 결혼해서 25년째 같이 살고 있습니다.





 두 딸을 낳고 셋째를 입양하셨어요. 어떻게 입양을 결심하셨나요? 셋째 희은이가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류마티즘 관절염 환자예요. 임신과 출산 자체가 만성질병 환자인 제게는 큰 어려움이었죠. 우여곡절 끝에 두 딸을 낳았는데, 출산과 육아를 겪으며 제 몸은 만신창이가 됐어요. 특히 양쪽 고관절이 다 없어져서 결국 둘째가 두 돌이 채 안 됐을 때 인공관절 수술을 받았어요. 그렇게 되기까지 너무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죠. 그러니 더 이상 아기를 낳는 것은 불가능했고요. 그런데 워낙 아이를 좋아하던 남편이 또 아이를 원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셋째는 입양을 하자고 하더라고요. 


사회적 참여를 강조하는 분위기에서 IVF 활동을 하면서 선후배와 친구들은 “우리가 결혼하면 입양도 하자”고 이야기했었어요. 또 남편이 신학을 공부하러 가게 된 미국에서는 입양가족들도 보았고 한인입양인들도 만났어요. 입양이 실제로 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고 남 일이 아니라는 생각은 했었죠. 그러니 남편이 입양 이야기를 꺼냈을 때 단칼에 거절하지 못하겠더라고요. 입양이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어요. 아이들이 가족이 주는 독점적인 사랑을 받지 못하고 보육시설에서 자라는 게 늘 안타까웠어요. 하지만 나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이미 애가 둘이나 있고, 간사인 남편은 집을 자주 비웠고, 게다가 돈을 많이 벌지도 못하는데다가, 저는 환자고…. 입양을 하지 않아도 되는, 할 수 없는 수많은 이유가 있었어요. 그런데도 입양이 제 마음에 부담으로 남아서 떠나질 않았어요. 말씀을 보거나 기도를 하면 이 생각이 사라지질 않는 거예요. 어쩌면 이런 마음을 ‘부르심’이라고 볼 수도 있겠죠. 


그러던 차에 남편이 담당하던 캠퍼스의 IVF 학생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어요. 응급실에 누워있는 그 아이의 주검 앞에서, 하나님이 부르시면 한순간에도 떠날 수 있는 게 인생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러면서 제 목숨이 붙어있는 한 의미 있게 살다가 가야겠다는 결심을 했죠. 당시 제 상황에서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일지는 고민할 필요도 없었어요. 그건 바로 입양이었죠. 이후 저희 가족은 입양기관에 가서 절차를 밟았고 비교적 순탄한 과정으로 희은이를 만나게 되었어요.


희은이는 지금 열다섯 살, 중학교 2학년이에요. 어릴 때는 맨날 병원 가는 게 일이었는데 기계체조와 양궁 선수로 활동할 만큼 건강한 아이로 자랐어요. 나중에 강력계 형사가 되고 싶어 해요(웃음). 희은이는 자신의 입양사실을 잘 알고 컸어요. 입양에 대해서 가족과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나눠왔고요. 그동안은 제가 입양에 관한 이야기를 앞에 나서서 했는데, 지난 5월에는 한 매체에서 희은이가 자기 이야기를 하기도 했어요. 



 입양에 관해 더 듣고 싶어요. 희은이를 입양하면서 공개입양을 선택하신 이유가 있나요? 입양가정에는 어떤 기쁨과 어려움이 있나요?


공개입양이란 주변에 알리는 게 목적이 아니라 입양 당사자인 아이에게 입양 사실을 알리는 거예요. 주변 사람들이 희은이 입양에 대해 모두가 알고 있는데 정작 아이에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죠. 게다가 비밀로 하려면 첫째, 둘째아이의 입막음을 해야 하는 거잖아요. 입양이 잘못도 아니고 부끄러운 일도 아닌데 아이들이 입양을 비밀스러운 일로 알게 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저희보다 먼저 공개입양을 선택한 입양가족들이 있어서 저도 용기를 낼 수 있었고요. 물론 공개입양이든 비밀입양이든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선택하는 거라고 봐요. 하지만 비밀입양을 택한 부모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부모 스스로 입양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기에 숨긴다는 생각이 들어요.


모든 가정마다 나름대로의 기쁨과 어려움이 있어요. 우리 가정도 마찬가지죠. 입양가정이라서 추가되는 기쁨이라면, 다른 입양가정들과 공유하는 연대감이에요. 어려움으로는, 취약했던 태내환경에 의한 건강문제가 나중에 발견되기도 해요. 생모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아이에게 알콜성 발달장애가 생긴 경우도 봤어요. 물론 내가 낳은 아이에게도 건강문제가 생기기도 하죠. 입양아는 낳아준 엄마아빠와 헤어진 아이들이에요. 아이가 어려서 기억에 남아있지는 않더라도 그 상처는 어떤 식으로든 표출이 되는 거 같아요. 그에 따른 고충을 입양 부모가 겪어야 해요. 아무래도 아이의 이런 상처를 세심하게 다루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죠. 내가 낳은 아이라고 해도 종류만 다를 뿐 각양각색의 상처와 괴로움을 겪고 살아요. 그게 인생이니까요.





 희은이와의 이야기를 엮어『너라는 우주를 만나(IVP)』라는 책을 집필하셨어요. 어떤 과정을 통해 이 책이 나오게 되었나요?


무수한 책이 쏟아져 나오는데 거기에 내 책 하나 보탠다고 세상이 나아지겠나 회의적이었고, 책을 만드느라 잘려나간 나무에게 미안해지지 않을 때쯤 책을 내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IVP에서 남편에게 부부 공동저자로 입양에 관한 책을 내자고 제의했어요. 처음 그 제안을 들었을 때는 제 관심사가 ‘입양’에서 ‘성’으로 옮겨간 상태라서 시큰둥했어요. 하지만 희은이를 공개입양으로 키웠던 경험, 입양가족 지역모임의 대표를 10년 했던 경험, 5년 동안 입양교육 강사로 활동했던 경험들은 기록 차원에서도 중요하다고 주변에서 말씀하시더라고요. 누군가는 내 책으로 도움을 얻을 것이라고 꼭 쓰라며 격려해주셨어요. 막상 책을 내기로 결정하자 결국엔 제가 글을 써야 했고, 부부 공저에서 단독 저자로 가게 된 거죠.


시중에 나와 있는 입양 관련 책 중에는 독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간증’류의 이야기가 많아요. 저는 희은이를 입양한 제 경험을 사회적 맥락에서 말하고 싶었어요. 또 입양이든 출산이든 아이를 양육한다는 면에서는 똑같아요. 큰 틀에서 ‘가족이란 무엇인가, 부모란 무엇인가, 부모자녀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하려고 했어요. 그리고 입양이라는 이슈와 얽히고설켜 있는 여러 가지 사회적 주제들을 짧게나마 생각해보게끔 구성했어요. 이 책은 가족 때문에 고민하는 분들, 입양 관심자, 더 나아가 입양을 할지 말지 머뭇거리는 분들이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진로와소명연구소’에서 성교육 강사로 활동하시게 된 계기도 궁금합니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저는 5년 동안 입양교육 강사로 활동했어요. 그러면서 제 자신이 어떤 주제에 대해 말하는 걸 즐거워하고 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몰랐던 저의 재능을 발견하게 된 거죠. 이제 입양에 대해서는 학위가 있는 사람들보다 잘 안다고 자부해요(웃음). 


국내에서 입양되는 아이들의 대부분은 미혼부모, 그것도 청소년 부모에게서 태어나요. 그러니 ‘입양’과 ‘미혼부모’는 밀접한 관련이 있지요. 희은이가 7살 때 이런 말을 했어요. “엄마, 우리는 입양으로 가족이 되어 행복한데요, 날 낳아준 엄마는 나를 떠나보낼 때 얼마나 슬펐을까요?” 7살 아이가 자기 아기를 떠나보내야 하는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더라고요. 또 제가 미혼모 보호시설에서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어요. 저는 자기가 낳은 아이를 떠나보내는 일을 줄이려면, 아기가 낳아준 부모와 헤어지는 일을 줄이려면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스러웠어요. 거시적으로 보자면, ‘아이 낳아 키우기 좋은 사회’를 만드는 게 근본적인 해결책이겠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제대로 된 성교육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부터 성에 관해서 많은 책을 읽었어요. 제가 자기주도학습을 아주 잘하거든요(웃음). 성에 대해 공부할 수 있는 곳이라면 달려가서 많은 교육을 받았어요. 이러면서 제가 제 나름의 관점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성 문제는 제 인생의 핵심문제 중 하나였어요. 깨어진 연애의 상처 중에는 성 문제도 있었고요. 그래서 제 관점을 잘 잡는 게 아주 중요했어요. 공부를 하면서 옛날의 제 자신과 상황에 대해 새롭게 해석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치유를 받았어요. 입양에서 시작해서 미혼모에 대한 관심으로 성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결국 제 인생을 돌아보고 속사람이 강해지는 계기가 되었어요.  


제 성교육을 들어본 분들의 피드백이 좋아서 입소문은 났는데, 제가 소속기관이 없었어요. 그래서 고민하며 기도하고 있을 때 ‘진로와소명연구소’에서 연락이 왔어요. 제가 꾸준히 공부하고 책을 추천하는 것을 페이스북을 통해 보시고는 같이 일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하셨어요. 저는 소속이 필요했고 연구소는 성에 대한 강의를 해줄 강사가 필요하던 때였죠. 지금은 서로가 윈윈하는 관계로 성장하고 있어요. 그렇지요, 소장님?(웃음)



 강의를 하다보면 여러 가지 어려움도 있을 것 같아요.


강의 현장에는 많은 변수가 있어요. 대부분의 변수를 제가 통제할 수 없고요. 교육현장은 정말 변화무쌍해요. 같은 이야기를 해도 저기서는 잘 통하지만 저기서는 꽉 막힌 느낌이 들기도 하죠. 청중을 다룰 수 있는 능력도 중요하고요. 또한 성은 입 밖으로 꺼내서 이야기하는 주제가 아니라서 제가 뭘 물어봐도 대답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예를 들어 ‘성기’라는 단어를 꺼내는 것도 굉장히 어려워하고요. 하지만 성은 우리 일상생활이에요. 성관계를 하든 안 하든, 우리는 누구나 성적인 존재니까 일상에서 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고 생각해요. 특히 교회가 성에 대해서는 더 보수적이라서 강의하기가 진짜 어려워요. 바위에 계란치기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그래도 희망을 갖고 강의하고 있어요.





 <소리>의 편집인으로 사역하신 이야기도 듣고 싶어요. 2011년부터 8년이나 <소리>와 함께하셨어요.


저는 환자였고 결혼하자마자 임신했기 때문에 사회생활을 하기가 어려웠어요. 저에게는 그게 굉장히 큰 열등감이었죠. 제가 전업주부로 살게 될 줄은 정말 몰랐거든요. 어쩔 수 없이 살림과 돌봄을 전담하면서 그나마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취미생활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거나 일기를 쓰는, 읽고 쓰는 활동이었어요. 한번은 IVP에서 독후감 공모전을 했는데 제 글이 1등을 했어요. ‘내가 글을 좀 쓰나?’하는 생각을 하던 중에 라디오 ‘여성시대’ 글쓰기 공모전에서도 대상을 탔어요. 


인정은 받았는데 과연 제 글이 어떤지 피드백을 받고 싶었어요. 막내까지 어린이집에 가자 오전에 시간이 생겼어요. 동네 평생학습관으로 수필을 배우러 다니기 시작했죠. 누군가 글을 써서 가져가면 30명 넘는 학생들(주로 어르신들)이 그 글에 대해서 어떤 점이 좋고 나쁜지 합평을 해줘요. 그분들 덕분에 저 혼자서는 전혀 몰랐던 제 글의 습관과 전개방식, 제 글의 장단점을 정말 많이 배웠어요. 또 어떤 마음으로 글을 써야 하는지, 어떤 글이 좋은 글인지 보는 안목도 생겼죠. 2009년에는 수필가로 등단도 하고, 상도 받고, 여러 지면에 제 글이 실리기도 했어요. 


그렇게 재미나게 글쓰기를 하던 중에 IVF 학사회에서 제안이 왔어요. 당시 대표였던 김중안 간사님과 학사회 총무였던 문태언 간사님이 “<소리>가 두 달에 한 번 꼬박꼬박 나올 수 있게 도와 달라”고 하셨어요. 저보다 한 달 먼저 <소리> 간사로 들어온 민혜경 간사를 도와서 교정교열을 맡아 달라고요. 그때 제 첫 마디는 “저는 IVF를 사랑하지 않아요”였어요. 당시 우리 부부 관계가 너무 안 좋았고, 저는 IVF에 남편을 뺏긴 것 같아 상한 마음이 많았거든요. 그랬더니 “사랑하지 않아도 상관없으니 나오게만 해달라”는 거예요(웃음). 글을 쓰고 보는 것은 제가 잘하는 일이었고 약간의 사례비도 주신다니 해보겠다고 한 거죠. 그게 벌써 햇수로 8년이네요. 


IVF 역사 속에서 <소리>가 폐간되었던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학사들로 구성된 소수의 편집위원들의 끈질긴 신념과 헌신으로 <소리>의 명맥이 이어져왔어요. <소리> 발간은 어떤 면에서 가장 학사자발적인 운동이 아닌가 생각해요. 기획부터 필자 섭외까지, 많은 부분을 편집위원들이 책임지거든요. 학사들의 고민을 담아내고 한국교회에 좋은 목소리를 내려고 두 명의 간사와 편집위원들이 많은 노력을 기울였어요. <소리>가 알음알음 알려지면서 IVF 후원으로 이어진 경우도 있어서 사역을 홍보하는 효과도 있었고요. 복음주의권의 어느 잡지보다 독특하고도 진중한 주제로 양질의 글을 싣지 않았나 하는 자화자찬을 해봅니다(웃음). 



 편집인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도 많으실 것 같아요.


제가 간사를 하기 전에 학사로서 받아본 <소리>는 ‘뜬구름 잡는다’는 느낌이었어요. ‘비전, 큰 그림, 학사운동’처럼 거창한 말을 하긴 하는데 실속이 없는 느낌이었거든요. <소리> 편집간사가 되면서 저는 사람들이 잘 다루지 않지만 피부에 와 닿는 주제를 다뤄보고 싶었어요. 


초반부터 편집회의에서 파격적인 주제를 막 던졌어요. 첫 번째로 강하게 밀어붙인 주제가 ‘사별’이에요. 아끼던 누군가를 죽음으로 잃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어요. 저는 적극적으로 필자를 섭외했고 그들이 글을 쓰게끔 위로하고 다독였던 기억이 나네요. 그 <소리>가 나왔을 때 굉장히 반응이 뜨거웠어요. 그후로도 저는 보통 사람들이 다루기 꺼려하거나 감히 묻기 힘든 주제들에 대해 다루었어요. 불임(난임)이나 자살유가족, 장애, 죽음에 관한 이야기도 해봤어요. 이런 주제에 대해 글을 쓰기로 한 학사들이 자신의 상황을 복기하면서 치유가 되든 더 아픔을 겪든, 저는 그 모든 과정이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육아와 교육 같은 일상적인 주제와 첨예한 정치적 이슈도 다루었고요. 


간혹 <소리>에 실린 글을 보고 “학사님들이 글을 너무 잘 쓰신다”고 칭찬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네, 맞아요. 정말 진솔하게 글을 잘 쓰세요. 다만, 원본과 <소리>에 실린 글을 비교해보시라고 한번 공개하고 싶네요(웃음). 제가 열심히 일을 한 결과입니다. 하하하.



 올해로 <소리> 편집인을 사임하신다고요. 앞으로는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가요?


앞으로는 잘나가는 성교육 강사가 되고 싶어요(웃음). 저에게는 글을 쓰는 것과 강의를 하는 게 아주 비슷해요. 하고자 하는 말을 글로 쓰느냐 말로 풀어내느냐의 차이죠. 성이라는 영역은 너무나 무궁무진해서 공부를 하자면 끝이 없는 것 같아요. 게다가 저는 인터넷 세대가 아니라서 인터넷 세상에서의 성 문제는 새로 배워야 해요. 인터넷 세상을 모르면 청중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줄 수도 있어요. 그래서 공부할 게 너무 많습니다. 강의안을 계속 업그레이드 해나가는 일, 청중에 따라 강의안을 조정하는 일, 청중의 특징에 따라 맞춤 강의를 하는 일, 모두 다 흥미롭고 도전적인 과제예요. 강연하는 일로 아주 유명해져서 돈을 많이 벌고 싶어요. 남편은 돈 버는 일과는 상관없는 일만 하거든요(웃음). 돈 벌어서 집 살래요. 너무 세속적인가요?(웃음) 나이가 드니까 이제는 이사를 그만 좀 다녔으면 좋겠어요. 이러다가 또 다시 많이 아프면 할 수 없고요.(웃음)



 마지막으로, 선배로서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편집간사로 8년을 일했어요. 결혼 전에 짧게 학습지교사를 했던 경험이 유일한 경력이었던 저를 IVF가 불러주어 잘하는 일을 하게 해줘서 감사해요. 많지는 않았지만(웃음) 제가 잘하는 일로 돈도 벌게 해줘서 너무 고마워요. 이 일을 통해 저도 많이 성장했어요. 혹시 그간 <소리>를 읽고 기억에 남은 글이 있나요? 편집위원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고 있으니까 학사님들에게 배달된 <소리>를 꼭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페이스북, 티스토리, 이메일 등을 통해 언제든지 피드백을 주실 수도 있어요. 그런 관심이 만드는 사람들에게 정말 큰 격려가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성교육을 할 때 “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불태(百戰不殆)”라는 손자병법의 한 구절을 인용해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뜻이래요. 살다 보면 실패하기도 하고 실수하기도 해요. 백 번 싸워서 백 번 이기는 싸움은 존재하지 않아요. 후배님들이 그런 허황된 목표로 자신을 닦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의 실수와 실패를 통해 무언가를 배워서 남은 인생을 위태롭지 않게 살면 되는 거예요. 인생은 이렇게 보면 짧고 저렇게 보면 깁니다. 의미 있는 일에 투신하기 위해서라도 자기 자신을 아끼고 잘 돌보시길 바랍니다. 그간 <소리>와 함께해서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몸이 불편한 상황에서도 엄마로서, 사회인으로서 뚜벅뚜벅 걸어오신 간사님의 삶에 큰 도전과 위로를 얻습니다. 

지난 8년간 <소리> 편집위원과 학사회의 간사로 섬겨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성교육 강사로서의 삶도 <소리>가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