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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사람] 소리이음

[소리가 만난 사람] IVF 사역을 마무리하며, "참 잘했어요!"_박태선,전선미(1)

[소리] 2017년 여섯번째 소리 - 12+01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 소리가 만난 사람 - IVF 사역을 마무리하며, "참 잘했어요!" (1)
▷ 소리가 만난 사람 - IVF 사역을 마무리하며, "참 잘했어요!" (2) 





<소리가 만난 사람>

IVF 사역을 마무리하며, “참 잘했어요!”



박태선 ◆ 부산대 86

전선미 ◆ 부산대 86


IVF에서 25년 동안 간사로서 사역하며 수많은 간사와 학사들에게 ‘마음의 공간’을 만들어주신 박태선 간사님 부부를 만났습니다. 

게다가 직접 집을 짓고, 손님들을 환대하여, ‘물리적 공간’까지 베풀며 살아가시는 이야기도 들어보았습니다. 







 <소리> 독자들에게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박태선(이하 태선)  부산대학교 86학번 박태선입니다. 졸업 후 현재까지 IVF 간사로 섬기고 있습니다. IVF와 관계를 맺은 시간이 어느새 30년이 넘었습니다. 제가 학생이었을 때 교회 대학부 전도사님이 부산지방회 IVF 간사여서 저도 자연스럽게 IVF를 알게 되었고, 입학하자마자 함께하게 되었네요. 


전선미(이하 선미)  저도 86학번이고요, 제 경우에는 1학년 겨울부터 IVF를 시작했습니다. 제가 지금은 하창완 목사님의 아내인 친구와 미술학부 디자인과를 함께 다녔는데, 그 친구가 IVF를 하고 있었어요. 같이 가보자고 해서 1학년 2학기 개강예배를 따라갔지만 여러 가지 문제로 고민하고 힘들어하느라 그 뒤로는 참석하지 않았죠. 겨울쯤 되어서 정신 차리고 신앙생활 열심히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어요. 다시 가보니까 종강예배를 드리더라고요(웃음). 수련회 팸플릿을 전부 들고 와서 그 뒤로는 방학 내내 쫓아다녔죠. 


태선 저희 두 사람은 IVF에서 만나 결혼했어요. 교제를 시작한 것은 대학교 2학년 1학기 마치고 여름방학부터였던 것 같아요. 


선미 아니야. 교제를 시작한 것은 10월의 마지막 날이에요. 가을이었죠.


태선 아내가 정확한 날짜 담당입니다(웃음). 햇수로 8년 정도 교제했어요. 그 사이에 한번 헤어져서 1년 정도는 그냥 친구 사이로 지내기도 하고, 저는 군대도 다녀왔어요. 아내는 졸업하고 나서 1년간 수산대 개척을 함께 하며 전담보조간사(지금의 활동학사)를 하기도 했고요. 22년 결혼생활 동안 딸 셋을 두었습니다. 첫째는 재수해서 대학교 2학년이고, 둘째가 대학교 1학년, 막내는 고등학교 1학년입니다. 첫째와 둘째는 동아대와 부산교대에서 IVF를 하고 있어요. 


선미 딸들이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 문제 등으로 고민하고 어려워하면 계속 IVF를 가야한다고 꼬셨어요. IVF에서 해결할 수 있다고요. 나중에는 딸이 “엄마는 나를 대학에 보내려는 거야, IVF에 보내려는 거야?” 하더라고요. 그래서 IVF를 보내려는 거라고 했죠(웃음). 




 박태선 간사님은 2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IVF와 함께하며 간사로 섬겨주셨어요. 

어떤 과정을 거쳐 오셨는지 궁금합니다.  


태선 처음에 간사를 하기로 결심했을 때 아버님이 크게 반대하셨어요. 지금도 교회를 잘 다니지 않는 분이라 이해하실 수 없었던 거죠. 군대를 가기 전이었는데, 간사를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한마디로 “집을 나가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제대 후에도 여전히 간사를 할 생각이라고 답했더니 반대를 안 하셨어요. 먹고 살수는 있겠냐고 하시기에 굶지는 않는다고 말씀드렸더니 아무 말씀 안 하시더라고요. 그때 반대하셨으면 안 하려고 했는데 말이에요(웃음).


처음 담당했던 캠퍼스는 경성대입니다. 그때는 출신학교로 가서 사역을 한다는 개념이 없었고, 3년마다 캠퍼스를 바꾸는 게 원칙이었습니다. 마침 사역자가 비어있던 곳이 경성대였기에 그곳을 맡아 3년간 사역하게 된 거죠. 그 다음으로 간 곳이 부산대입니다. 부산대 역시 3년간 사역하기로 하고 들어갔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 5년 동안 하게 됐네요. 


부산대 사역을 마친 후에는 신학연수로 고신대에 입학했어요. 학교는 생각보다 재미있었어요. 특히 교수님들과 관계 맺으며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던 일이 좋았습니다. 교수님들은 학생들과 함께하는 학풍이나 분위기를 만드는 것에 두려움이 없었어요. 밥을 사거나 집에 불러 대접하기도 하시고, 학생들의 문제 제기나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으려 하셨죠.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말이에요. 신학생활을 하면서 2년 정도는 가족들과 다함께 천안에서 살기도 했어요. 이런 결정이 가능했던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부산 지방회의 도움과, 교회사역을 하지 않고 공부에 집중하는 학생에게 지급되었던 목양 장학금 덕분이에요. 학비가 장학금으로 다 나오는데다가 간사 월급까지 있으니 충분히 이사를 갈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죠.  


선미 저희 둘 다 평생 부산에서만 살다가 딱 2년을 바깥에서 살았던 셈이에요. 하지만 멀리는 못 갔네요. 처음 1년 동안 부산과 천안을 오갈 때는 애들도 3살, 5살로 어렸고, 남편은 집안의 일원이 아니라 손님이 된 느낌이 든다며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감사하게도 기회가 생겨서 좋은 모양으로 올라가게 된 것이죠. 신대원은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학생들이 없어서 학교가 비어요. 그러면 저희 가족들이 신대원 운동장에서 축구도 하고, 도서관에 앉아서 책도 보고, 수위아저씨가 나가라고 하면 나가기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태선 천안에서 보낸 시간이 참 좋았던 것 같아요. 천안으로 이사한 첫해에는 매주 교회를 어디로 갈 것인지 고민했어요. 지도를 찾아보면서 이곳저곳을 다녔는데, 반년 정도 되니까 설교가 아무리 좋아도 공동체가 없다는 점이 힘들더라고요. 아내는 유령이 된 기분이라고 했어요. 때마침 기회가 닿아 용인에 있는 ‘항상 교회’에서 사역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워낙 건강한 교회였고 목사님도 참 좋으셨어요. 목회를 저렇게도 할 수 있구나 하고 배우기도 했습니다.


복귀한 후에는 서부산 대표간사로 섬겼습니다. 당시의 상황이 쉽지는 않았어요. 동서부산에서 통합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시기였거든요. 지난 3~4년 동안 모든 상황을 고려해서 통합에 대한 이야기를 해왔다고 했어요. 간사들의 사역적인 모델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사회를 어떻게 묶을 것인가, 학사회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의해온 거죠. 이사들도 지쳐있고 간사들도 지쳐있었어요. 그림만 수십 개 그렸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일단 통합을 해놓고 생각해보자고 결론을 내렸어요. 제가 대표간사가 된 지 1년 만에 드디어 동서부산이 통합을 하게 된 것이죠. 여러 논의 끝에 제가 통합 지방회의 대표간사까지 맡게 되었어요. 이후에 대표간사를 사임하면서 훈련사역부의 간사로 섬기게 됐습니다. 






 훈련사역부의 간사로 정말 오랫동안 사역하셨는데요, 얼마나 오래 일 하신 거죠? 

1년에 3~4개월 정도는 집을 비우셨을 텐데 가족들은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태선 훈련담당 간사로 7년 동안 섬겼습니다. 연차로 하면 8년차네요. 이렇게 오래 할 줄은 몰랐어요. 저는 무척 재미있게 했고 공동체에도 나름대로의 유익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선미 7년 동안 남편은 추석쯤 훈련을 위해 집을 떠났다가 연말쯤에 돌아오곤 했어요. 저희 부부는 워낙 관계가 좋기 때문에 보고 싶은 마음이 크긴 했지만, 남편은 본인이 부재하면 제 영성이 더 좋아진다고 해요. 남편이 없으면 불편하고 안 좋은 점이 있는 반면, 묘하게 제 생활에서 물리적인 공간이 생기거든요. 그래서 말씀보고 기도하는 시간은 오히려 확보되는 경향이 있었어요.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저희 큰아이가 학교를 그만두기로 결정했을 때에요. 혼자서 일주일 내내 마음을 졸여야 했거든요. 중요한 타이밍에 의논할 상대가 없다는 점이 무척 힘들더라고요. 집안을 전부 혼자서 끌고 가는 느낌이 들었어요. 지금의 집으로 이사하던 첫 해에는 아직 집의 공사가 끝나지 않았는데 공사를 하다가 말고 들어가더라고요. 저는 다른 학사님과 함께 새벽 두시까지 작업하며 나머지 공사를 마무리해야 했어요. 그 다음 해에는 ‘이 동네에 사람이 살긴 사나? 우범지대는 아닌가?’하는 안전에 대한 걱정이 컸어요. 아파트에서 살다가 주택으로 이사를 왔는데 동네가 아직 익숙하지 않았으니까요. 다행히 아이들과 관계가 좋으니까 남편이 없는 시기에도 의지가 되었어요. 무엇보다 ‘슈퍼스타 K’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웃음). 항상 시즌이 시작되면 남편이 가고, 결승전이 끝나면 돌아왔거든요. 묘하게 저를 위로해주는 방송이었네요. 


사실 생활을 꾸려야 하기에 외롭고 쓸쓸할 틈이 없었어요. 친정어머니가 건강이 안 좋아서 주간보호센터에 다니셨는데, 아침에 준비시켜서 보내드리고 또 오후에 돌아오시면 모시고 들어오고를 반복했죠. 당뇨도 있어서 정확한 시간에 식사를 하셔야 했고 아이들 세 명이 전부 학생인데다가 저는 편집 일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를 보내는 게 너무 바빠서 정신이 없었어요. 


태선 아내는 어떤 일이 결정되면 빠르게 받아들이는 편이에요. 그런 면에서 단호한 부분이 있어서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아이들이 나이가 들고 십대를 넘어선 것도 큰 도움이었어요. 예전처럼 많은 시간을 들여서 돌봐야 하는 것도 아니고 대화도 되니까 서로를 어떻게 도울 것인지 함께 고민하게 되었거든요. 




 간사 사역을 올해로 마무리하시게 되었어요. 삶의 방향이 큰 터닝을 하게 되었네요. 

요즘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태선 최근에 간사들을 만날 때마다 어떻게 지내냐고 자꾸 물어서, 저는 벌써 사임식의 예행연습을 한 기분이에요(웃음). 요즘 감사한 일을 계속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사실, 조금 더 젊은 나이도 아니고 조금 더 나이 든 후도 아니고 50대 초반이라는 시기에 간사를 사임하는 것에 대해서 주변에서 걱정이 많습니다. 그러나 불만이나 불평보다 감사함이 훨씬 많습니다. 25년이라는 세월을 공동체가 참아주고 인내하면서 제가 잘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고, 사람들에게 인정과 칭찬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어요.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남았습니다. 잠시 만났다가 금방 헤어질 관계가 아니니까요. 정말 감사한 시간을 보냈구나 싶어요.  


선미 옆에서 남편을 지켜보면서, 큰 굴곡 없이 한 가지 일을 안정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감정의 기복 없이 큰 그림을 그리면서 안정적으로 갈 수 있다는 부분이 남편의 장점인 것 같아요. 저 역시도 대학 때부터 IVF와 관계를 맺었고, IVF에서 남편도 만났고, 간사 사모로 살게 되었습니다. 저는 IVF에서 헌신하고 옆에서 도울 수 있다는 게 참 좋았습니다. 감사할 따름이죠. 


저희 아이들도 지금 IVF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고, 이를 보면서 새롭게 느끼는 바가 많아요. 큰아이는 본인이 지금 간사인지 학생인지 헷갈릴 정도에요(웃음). 소그룹 멤버들과 원투원하는 시간이 아깝지 않다는 얘기도 하고, 가끔은 엄마에게 어떤 고민이 있냐며 제게 원투원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둘째도 대학에 들어간 직후에 신앙생활에 대한 고민이 많았는데, 하루는 내천을 혼자 거닐고 있다고 전화가 온 거예요. 말씀에 은혜를 받아서 묵상하는 중이라고 하더라고요. 말씀을 통해 신앙적 고민들을 해결 받았다면서요. IVF 사역이 힘들다고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이들이 헌신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가 20년 동안 해온 일들이 헛되지 않았구나 싶습니다. 재밌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해요. 물론 IVF 하면서 성적 떨어지는 것을 보면 걱정되기도 하지만요(웃음). 





 두 분이 IVF를 하던 시절과, 자녀들이 IVF를 하는 모습이 많이 다를 것 같아요.


태선 동일한 부분도 있어요. 특히 하나님에 대한 진지함이나 은혜를 경험하는 본질적인 부분은 지금도 살아있다고 생각해요. 대학생으로서 가지는 고민이나 관계의 어려움도 여전합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비슷한 것 같아요. 어른이 보기에는 그냥 시간이 지나면 될 일인데 아이들은 그것을 끌어안고 고민하며 끙끙거리고 긴장하기도 하고 풀리면 좋아하기도 하는 모습이 참 똑같은 거 같아요. 


다른 부분이면서 희망적이라고 생각하는 점은, 숫자에 위축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신입생이 들어올 때 많이 들어왔다고 기뻐하는데, 우리 시대의 기준에서는 많이 들어온 게 아니거든요(웃음). 다만 우리 때보다는 상황이 어렵기에 많이 짓눌려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우리는 어렵다고 해도 뭐든 먹고 살 수 있었고 길이 보이는 상황이었는데, 지금은 무척 억눌려 있는 것 같아요. 


선미 교회에 IVF 활동을 열심히 하는 자매들이 있어요. 오히려 우리 때보다 더 열심히 하는 것 같아요. 밥 한번 먹자고 해도 스케줄을 보면 거의 매일 IVF 모임이 있더라고요. 큰모임, 작은 모임, 선교부모임, 가계부모임 등 다양한 모임이 생겨나고 있어요. 훨씬 학생 자발적입니다. 예를 들어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다고 하면 스스로 책모임을 만들어서 나눔도 하고 토론도 하며 애를 쓰고, 외부 강사님이 강의를 하시면 학생들은 모여서 그에 대해 피드백도 나눠요. 우리 때는 간사님이 하시는 이야기니까 당연히 그런가 보다 했던 부분들을, 지금의 학생들은 나름대로 고민하고 자신들이 가진 생각으로 비판하기도 합니다.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일면에는 여전히 힘들어 하는 부분도 있어요. 재정적인 부분을 본인이 해결해야 하는 자매들도 많고요. 지금 애들은 우리 때보다 훨씬 똑똑하고 뛰어난 것 같은데, 우리보다 훨씬 어렵게 사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 다음 연재글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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