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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워킹+맘= 죄인인가 신(神)인가?] 육아휴직 권장서_이지연


 

[소리] 2017년 두 번째 소리- 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육아휴직 권장서

 

이지연 | 연세대00

부부상담가를 꿈꿨으나 육아의 현실 앞에서 잠시 주춤하고 있는 5년차 연구원.

아동구호단체에 다니는 남편과 5, 7살 자매와 함께 살고 있다. 사람을 만나고 이해하며 알아가는 시간을 좋아하고, 대안 적인 삶에 귀를 팔랑이며 살고 있다.

 


 

2013년 어느 날

 

  A는 전업주부다. 이제 막 기기 시작한, 등에 센서가 달린 둘째를 업어 재우고 이유식을 챙겨 먹이면 서, 틈틈이 두 살 위 첫째아이의 비위를 맞추다 보면 하루가 가버린다. 두 아이의 상태가 안 좋으면 같이 울어 젖히는 통에 둘을 한 팔씩 안고 얼러주어야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저녁 무렵이 될 때부터 시계만 쳐다본다. B가 퇴근할 시간이 다가온다.

 

  B는 종종걸음으로 퇴근 인파로 가득한 지하철을 빠져 나온다. 집에는 B가 퇴근하기만을 기다리는 A와 아이들이 있다. 집에 도착했지만 문을 여는데 머뭇거린다. 마음을 추스른다. 열린 현관문 사이로 보이는 건 소파에 축 늘어진 A의 다크서클. 격동의 하루를 증명하듯 어지러운 거실과 설거지통에 수북한 그릇. 어느새 둘째는 B에게로 기어와 발에, 첫째는 손에 매달린다. 2교대가 시작된다. 여기서 B는 나고 A는 남편이다. 2013년 둘째의 출산휴가가 끝났을 때부터 남편은 열한 달 동안 휴직을 했다. 그 중 반년은 첫째를 어린이집에 보내기 전이라 남편은 하루 종일 아이 둘과 지냈다. 육아휴직을 시작한 후 남편은 부쩍 얼굴에 그늘이 지고 건강이 안 좋아졌다. 자주 몸살이 나고 편도가 부었다. 감기가 심해져 급기야 입원까지 한 적도 있었다.

 

  시아버지는 나를 볼 때마다 미안하다는 말씀만 하시고, 남편에게는 어서 복직하라고 종용하신다. 친정 부모님도 젊을 때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며 혀를 끌끌 차신다. 남편 회사에서는 수시로 언제 복귀 하느냐는 전화가 걸려온다. ‘남성의 육아휴직과 같은 캠페인에서 종종 보이는, 귀여운 아이의 손을 잡고 행복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아빠의 현실은 결국 이런 것 이었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남편의 육아휴직 계획은 첫째가 태어난 후 1년 뒤, 내가 취직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둘째를 낳으면 본인이 꼭 육아휴직을 하고 싶어 했다. 가장 큰 이유는 육아는 부부 공동의 몫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남편은 남녀 역할에 대해서 구분을 두지 않는 편이다. 물론 능력의 차이에 따라 일을 분담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다. 예를 들어 병 따기나 고장 난 집기 수리 그리고 요리는 소근육과 미각이 발달한 남편이, 재정 관리나 정보 수집 등은 간발의 차이로 더 꼼꼼한 내가 맡았다. 하지만 그밖에 청소나 설거지, 빨래, 짐을 옮기거나 바느질을 하는 일 등의 모든 영역은 공동의 책임이었다. 그래서인지 양육 또한 공평하게 분담해야 한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물론 여기서 신념이 체력을 앞서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은 밝혀둔다. 주말 요리는 아빠 담당 임에도 늦잠을 자느라 내가 밥을 짓게 되기 일쑤였고, 밤새 아이의 울음을 못 듣고 태평하게 자는 남편에게 나는 따가운 눈총을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남편은 나보다 더 따뜻한 사람이었다. 아이가 예뻐 어쩔 줄 몰라 하고 아이가 다치기라도 하면 나보다 훨씬 더 속상해하는 남편을 보면서 나는 나의 모성 부족을 의심하기도 했다. 아이와 해보고 싶은 것도 많은 남자라, 수유와 같은 엄마만이 할 수 있는 육아 영역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부쩍 커가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휴직기간만큼이라도 아이들과 실컷 부대끼며 지내보고 싶다 했다.

 

  이와 함께 일을 잠시 놓고 재충전을 하고 싶다는 원대한 꿈이 있기도 했다. 미뤄뒀던 취미생활도 다시 시작해보고 짬을 내어 무언가를 배워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막연히 현재의 삶을 평가 하고 미래를 고민해보고 싶어 했다.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동네를 거니는 여유를 상상하며 육아휴직을 기다렸다고 했다(그래서 육아 현실은 더욱 참혹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나도 첫째를 낳고 1년 동안 오롯이 아이와 함께 보냈던 시간이 힘들긴 했지만, 뒤돌아보니 그만큼 보람도 있었고 소중하게 느껴져 남편에게 적극적으로 권했다. 그 저변에는 육아가 이렇게 힘들다는 것을 당신도 한번 느껴 보라는 음흉한 의도도 있었다.

 

육아휴직을 하기까지

 

  사실 남편은 NGO에서 일하고 있어 일반 회사보다 육아휴직이 쉬운 편이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 직원 중 육아휴직이 끝난 뒤 복직한 직원은 거의 없었고, 그나마 돌아온 직원도 원하는 보직으로 복귀할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남자 직원이 육아휴직을 고려한다는 것은 잠정적 사직 의사와 비슷하게 받아들여졌다. 급기야 휴직 직전 남편의 상사는 조직을 위할 줄 모른다.’ 라든가 개인주의적이라는 둥, 이러저러한 훈계로 남편의 휴직을 만류하려 했다. 당시 남편이 팀 내에서 가장 오래된 조직원이기도 했고 팀장 제의를 받은 직후였기에 휴직을 한다는 것이 더더욱 조직을 등지는 것처럼 보이는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양가 부모님들의 반대도 있었다. 어르신들의 생각으로는 일하는 사람이 고생하는 사람’, 아이를 보는 사람은 집에서 쉬는 사람이다. 특히 남편이 집안의 경제를 내게 맡기고 집에서 쉬기로결정했다고 느끼시는 양가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다. 경제적인 이유도 컸다. 한창 같이 벌어 돈을 모아야 할 젊은이들이 번갈아 가며 쉰다니.

 

  하지만 남편의 장점이자 단점이 되기도 하는 특성은 뚝심이 강하다는 것이다. 남편은 가치에 헌신하는 스타일의 사람이라 그 일이 옳다고 여기면 무모 하리만큼 앞뒤를 재지 않는다. 그래서 진심인 듯 아닌 듯 안 되면 퇴사하지 뭐라는 말과 함께 휴직계를 냈고, 부모님께 육아휴직이 왜 우리 가정에 중요 한지 설명하며 설득을 가장한 통보를 드렸다. 남편의 휴직은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육아휴직 기간에 남편은 무엇을 했나

 

  당연히 남편의 24시간은 육아로 점철되었다. 남편이 누린 유일한 호사는 아이를 등원시키고 난 뒤 잠깐의 산책이 전부였다. 여느 전업주부들이 그렇듯, 다음 날 종일 피곤해질 걸 알면서, 아이들을 재우고난 뒤의 자유시간이 아까워 평소엔 눈길도 주지 않던 드라마를 밤늦도록 보기도 했다.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남편은 모임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나보다 아줌마들과 더 쉽게 친해지는 그는 주부모임에 끼어들었다. 일주일에 한 번 모여 일상을 나누는 주부 모임에서 위로와 격려를 받았고, 모처럼 아이와 함께 편하게 외출하는 그 날이 기다려진다고도 했다. 주부모임에 다녀온 날은 얼굴에 생기가 돌며 모임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를 쏟아내곤 하였으니, 육아에 찌든 남편에게 활력소가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집에서 가까운 대학의 IVF 예비졸업생들을 초대해 소그룹 모임도 시도했다. 그네들에게 실제로 유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남편이 그들의 고민을 같이 고민하며 도움을 주려는 모습은 진지했다. 사람의 자존감을 세우는 두 가지가 중요감과 안정감이 라고 했던가. 육아에 지친 와중에 이러한 크고 작은 모임들을 통해 남편의 중요감과 소속감이 채워질 수 있었던 듯하다.

 

육아휴직 후 남은 것

 

  결국 회사의 부름에 못 이겨 1년을 한 달 남기고 복직하면서, 남편은 두 가지를 아쉬워했다. 육아를 너무 힘들게만 느끼며 보내느라 아이들과 실컷 놀지 못한 것과 자기만의 시간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이들이 좀 더 큰 후에 다시 한 번 더 육아휴직을 시도해보려 하고 있다.

 

  휴직을 통해 얻은 것도 있다. 일단 살이 빠졌다. 그동안 숱한 방법으로 다이어트를 시도해왔지만, 육아만큼 효과가 크진 않았다. 회사에서 습관처럼 먹던 간식이 빠지기도 했고, 아이들을 보면서 입맛인지 식욕인지가 없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줄기차게 집 밥을 먹게 되니, 외식을 하면 오히려 배탈이 나는 건강한 위장을 갖게 되었다(회사에 복귀하면서 금방 나트륨에 단련된 몸으로 돌아갔지만).

 

  그리고 주부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 깊어졌다. 남편의 잦은 출장이나 야근으로 독박육아를 하는 주부들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곤 했다. 스스로 휴직 전 아무 생각 없이야근했던 것을 무척이나 민망해 했고, 조금이라도 칼퇴를 못하는 날에는 걸려오는 전화에서 미안함이 넘쳐흐르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물론 이전에도 퇴근이 늦는 것을 미안해하긴 했지만, 나는 뒤늦게 그것이 온전하지 않은 사과였음을 알게 되었다). 집에 와서 아이를 재운 뒤 일을 하는 날이 많아졌고, 팀 내 눈치를 받으면서도 야근 시간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가장 혁신적인 변화는 남편이 육아와 살림을 온전히 자신의 몫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전에도 내가 상위 3프로 남자라고 인정할 정도로 남편은 살림에 적극적이었다. 겉으로는 가사와 양육을 공평하게 분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미묘하게 집안일의 주 담당자는 나, 그리고 이를 돕는 남편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애초에 1년간 전업으로 첫째를 키우면서 내가 살림과 육아의 원칙과 노하우를 더 많이 갖게 되었다. 그래서 남편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 달라고 요청하게 되고, ‘입 아프니 내가 하자싶어 남편에게 부탁하기보다 내가 나서서 후다닥 해치우기도 했다. 그럴수록 남편은 지시를 기다리는 수동적 가사참여자가 되었다. 하지만 휴직 기간 살림의 주 담당자가 남편으로 바뀌면서 남편의 눈에도 살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더 이상 외출 할 때 아이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챙겨달라고 요청하거나, 세탁기 돌릴 때가 되었다고 알려주거나, 아이들 양치를 시켜달라고 부탁하지 않아도 남편은 어느새 그 일을 하고 있었다. 나와 전적으로 대체가능한 가사 인력으로 변모해 있었고, 좀 더 바지런한 남자가 되어 있었다.

 

  나도 변한 게 있다. 남편들에 대해 좀 더 이해하게 되었다. 왜 가끔 남편이 퇴근 후 카페에 있으면서 업무 때문이라고 둘러댔는지, 왜 그렇게 아이가 어린 남편들이 야근에 매달리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퇴근 후 문을 열자마자 밀려드는 육아와 지칠 대로 지쳐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남편을 보기만 해도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이런저런 잔소리까지 해댔으니 남편에게 얼마나 집이 쉴 수 없는 공간이었을까 싶어 미안해졌다. 더불어 맞벌이를 하면서 아이를 직접 돌보지 못한 다는 죄책감이 컸는데, 남편의 휴직이 이를 많이 덜어주었다. 한창 엄마아빠를 찾는 아이들에게 아이 아빠가 함께 있어준 것, 그리고 아이를 돌보시느라 힘드셨던 어머님에게 쉬는 시간을 드린 것 모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가 아파도, 아이에게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겨도, 3자에게 부탁 하며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되니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출근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에게도 아빠의 휴직은 특혜와 같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사진을 좋아하는 아빠를 둔 덕에, 그 시기 아이들의 사진이 가장 많다. 첫째가 어린이집에 적응할 때 아빠가 곁에 있어준 것도 아이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기질적인 부분도 있겠지 만, 아빠가 주로 키운 둘째는 첫째보다 훨씬 더 많이 아빠를 찾는다. 유독 아빠에게 살가운 둘째는 아빠에게도 큰 기쁨이다.

 

  남편이 말하기를, 휴직으로 가장 크게 얻은 것은 한 사람이 자라는 데 누군가의 전폭적인 수고와 헌신이 따른다는 것을 몸소 깊이 체험하게 되었다는 점이라고 한다. 이는 육아뿐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회사 동료나 아래 직원들을 대할 때도 그 사람을 키우는 데 든 수고를 헤아리며 상대를 더욱 존중하게 되었다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남자가 석 달만이라도 육아휴직을 하도록 법제화된다면 세상이 바뀔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다른 아빠들에게 열심히 육아휴직을 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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