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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정치 참여, 그 현장에 서다] 경계인(境界人)_이진경

[소리] 2017년 첫 번째 소리- 0203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경계인(境界人)

 


 

나는 매학기 첫 강의마다 내 학생들에게 그들이 나의 관점을 듣게 될 것이라고, 하지만 다른 이들의 관점도 공정하게 다루도록 애쓰겠다고 분명히 말했다. 나는 학생들에게 나와 의견을 달리 하라고 격려해 주었다. 나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객관성을 가장하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고 말하곤 했다. 몇몇은 이 은유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는데, 어떤 학생들은 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그 의미를 자세히 분석해 보기까지 했다. 다른 학생들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바로 알아챘다. 이미 사태가 치명적인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고, 여기서 중립적이라 함은 그 방향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중립의 허구성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조국의 치부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이라고 믿는, 그리하여 소위 자칭 애국자들로부터는 국익을 해치는 이적행위자로 비난 받는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의 말이다. 그리스도인은 정치에 참여해야 하는가? 아니, 해도 되는가?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라는 다소 진부하고 고전적인 주제를 앞에 두고, 하워드 진은 참여를 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 가의 고민이 얼마나 천진하고 어리석으며 적절치 않은가를 이 말을 통해 분명하게 보여준다. 사태가 치명적인 방향으로 움직인 순간 내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정치적 참여는 이미 시작된 것이기 때문 이다. 이 상황 속에서 정치적이지 않을 도리는 없다. 어떤 입장에도 서지 않고 제3의 정치적 무풍지대에 서겠다는 중립의 선택은 불가능하다. 만일 이때 중립을 택한다며 나는 정치적이지 않겠어라고 선언한다면 그것은 현재의 방향을 지지하는 가장 정치적인 선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 참여에 대한 출발은 바로 이 지점이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아마도 1987년 혹은 88년쯤일 것이다. 그래도 나름 열성 IVFer였던 나는 여름방학을 가득 채울 수도 있을 재미난 일들을 모두 제쳐두고 IVF 서울지역 수련회에 참석했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방학 중 그밖에는 거의 할 일이 없어서 갔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무려 30여 년 전이니 때와 장소에 대한 기억 이야 정확할 리 없겠지만, 여러 특강 중 한 강의에서 커다란 충격을 받았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강사의 얼굴도 이름도 기억에는 없다. 그러나 내용의 요지만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은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주장은 물론 여러 가지 상황과 맥락과 신학을 동반하여 함께 설명해야 할 말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이 영혼에 준 충격은 굉장했다.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청년 이진경이 받은 충격의 실상을 50 대로 접어든 이진경의 입장에서 하워드 진의 언어를 빌려 표현해 보자면 아마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때 나는, 나 자신이 불의와 착취를 향해 빠르게 달려가는 자본주의라는 기차 위에 있었음을 서늘하게 깨달았던 것이다.

 


 

정치적이라는 말의 의미

 

유감스럽게도 정치라는 말은 몹시도 오염되었다. ‘정치적 인간이 뜻하는 모욕적 의미에서처럼 말이 다. 어쩌면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에 참여한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에는 이 단어의 오염도 분명 한몫을 하고 있을 것이 다. 하지만 흔히 사용되는 것처럼 정치적이 된다는 말은 어떤 특정한 입장이나 특정한 당을 지지하거나 반대한다는 당파적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적이란 말의 바른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정치적 인간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정의를 테렌스 데 프레의 생존자라는 책 속에서 발견한 적이 있다. 그는 정치적 인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정치적 인간이란 그 사회 내의 다른 사람들과 드러나지 않는 관계를 맺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 이다.” 그렇다면 정치적 의식이란 다름 아닌 우리 모두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이다.

 

사회적 약자로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의식하는 순간, 고통 받는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시선은 확실히 달라진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이 결여되어 있을 때라면 타인의 고통은 심지어 내 감사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아프리카에서는 사람들이 불쌍하게도 굶어 죽는데 지금 풍족한 밥을 먹을 수 있는 우리 처지는 얼마나 감사한가와 같은 감사기도를 식탁에서 드린 적이 있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떤 죄를 짓고 있는 것인지 수잔 손택은 그녀의 책 타인의 고통에서 잘 보여 주었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고통 받는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은 그들 고통의 원인에 나 역시 나도 모르게 가담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의식으로 이끈다. 그것은 내가 더 가지고 있기에 그가 더 가지지 못한 것이라는 깨달음 이다. 그리하여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은 우리의 연민과 감사의 위선을 폭로하고 그것을 수치와 죄책감으로 바꿀 것을 요구한다. 진은영 시인이 눈먼 자들의 국가에서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라는 글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으며, 박노해 시인이 어머니의 일평생 기도에 대한 회개를 담은 시 감사한 죄에서 전하고자 했던 것도 역시 그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는 것, 정치적 인간이 된다는 것은 바로 그런 뜻이다.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 그리스도인에게 정치적이지 않을 도리는 없다. 그러니 언제나 문제는 정치적이어야 하는가 아닌가가 아니라, 어떤 올바른 정치적 선택을 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참여의 영성과 경계인

 

그 여름 강의기간에 그 사목 활동가들과 이야기하면서 나는 나 자신의 영성이 얼마나 개인주의적이고 엘리트 의식에 젖어 있었던 것인가를 인식하게 되었다. 많은 측면들에서 영적인 생활에 관한 나의 사고는 내적인 삶을 강조하고 그러한 삶을 발전시키기 위한 방법과 기술들을 강조하는 북아메리카의 주변 환경에 의해서 깊이 영향을 받아왔다는 것은 고백하기 어려운 일이었으나 사실이었다. 나는 구스타보가 가난한 자들의 역사 안으로의 돌입이라 부르는 것과 맞부딪혔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나의 영성이 어떻게 영성화되었는가를 인식하게 되었다. 내가 알고 있었던 영성이란 사실상 내적인 조 화와 정적을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시간과 공간의 사치스러움을 가지고 있는 내성적인 사람들을 위한 영성이었다.”

 

인용문에서 글쓴이가 친근하게 부른 구스타보는 해방신학으로 유명한 바로 그 구스타보 구티에레즈가 맞다. 내적인 삶을 강조한 영성에 대한 비판과 가난한 자들과의 대면을 통해 획득된 새로운 차원의 영성. 우리가 여태껏 영성이라고 부르고 이해했던 태도들을 자기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왠지 좌파스러운 새로운 영성으로의 깨달음을 소개한 이 사람은 대체 누굴까? 이 사람은 소위 무슨 운동권 출신의 영성가가 아니라 바로 누구나 인정하는 영성의 대가 헨리 나우웬이었다. 해방신학의 영성을 소개했던 구티에레즈의 우리의 우물에서 생수를 마시련다라는 책의 서문에서, 헨리 나우웬은 고통 받는 자들과의 연결 의식이 결여된 영성이 얼마나 가식적이고 그릇된 자기 의로 가득 찰 수 있는지를 통렬한 자기 고백으로 우리에게 보여준다.

 

참여의 영성이라 부를 만한 이 영성의 관점에서도 결국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는 참여의 여부가 아니라 어떻게 참여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인 셈이다. 죽음의 세력으로 가득 찬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민수기 16장의 이야기를 떠올리곤 한다. 민수기 16장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의 적반하장은 그들이 광야 생활 내내 줄기차게 보여준 적반하장 중 가히 최고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도전했던 일군의 무리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자, 이번에는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여 일어난다. 더 이상 참지 못한 하나님은 모세에게 회중을 떠나라 말씀하시고 백성을 순식간에 진멸시키시기 위해 전염병을 퍼뜨리신다. 그러나 모세는 예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너는 비켜서 중립이나 지키고 있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당장 제사장 아론을 시켜 제단의 불을 담은 향로를 들고 백성들 속으로 뛰어 들어가 속죄하게 했다. 그 이야기의 끝을 성경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가 죽은 자와 산자 사이에 섰을 때에 염병이 그치니라”(16:48).

 

성경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을 제사장이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제사장의 해야 할 일은 바로 이것이 다.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서 그 사이의 경계인으로 서는 일, 죽음의 세력이 더 이상 퍼지지 못하도록 몸으로 막아서는 일. 말하자면 정치 참여란 이렇게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서는 일이며 그 둘 사이에서 경계인으로 사는 일이다. 그것은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애매한 회색의 중간지대에 서 있겠다는 가능하지도 올바르지도 않은 중립(中立)이 아니라, 생명과 죽음 사이 가운데 서는 중립(中立), 그 가운데 서서 생명을 등지고 죽음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맞서는 중립(中立)이다.

 


 

구체적 행동을 위한 지침 : ‘무엇을이 아니라 어디에

 

경계인에게 보다 결정적이고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가이다. ‘무엇 을’(what)이 아니라 어디에’(where)의 문제라는 말이다. 한 사태와 사안에 대한 정치적 입장은 같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조차 극명하게 다를 수 있다. 이질적인 두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롤랑 조페의 영화 <미션>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포르투갈 군대의 학살에 직면한 원주민 신도들을 위해 한 신부는 총칼을 들고, 다른 한 신부는 십자가를 든다. 그러나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사실은 두 신부 모두 그 자리에 있었고, 하나님을 향한 신심과 양심에 거짓이 없었으며, 둘 다 그 자리에서 순교했다는 사실 이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지 모른다면 그것에 대해 고민하기보다 우선 그저 고난의 현장으로 발을 옮겨 그곳에 서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자.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착취하는 현장은 어디에나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임하지 않았으니 어차피 불의는 도처에 있는 것이다. 내가 겪는 불의의 현장이든, 타인이 겪는 불의의 현장이든, 그 수많은 불의의 현장 중 갑작스레 마음에 거룩한 부담으로 다가오는 곳이 있다면, 어쩌면 그곳이 바로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곳이리라. 비정규직으로 주리고 목마르며, 소수자로 혐오와 차별을 받고, 부당해고로 헐벗고, 병들었으나 돈이 없어 치료도 못 받고, 무고하게 옥에 갇힌 사람들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25:31-46)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란 그 어떤 비종교적이고 세속적인 강령의 실천이 아니라, 단지 주님이 말씀하신 저 사람들 곁에 서서 죽음이 그들의 생명을 앗아가지 못하도록 죽음과 생명 사이에 서는 일일 뿐이다.

 

노숙자들의 아버지라 불렸던 아베 피에르 신부는 천국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말을 남겼다. “세 사람이 있는데 그들 중 가장 힘센 자가 가장 힘없는 자를 착취하려 할 때 나머지 한 사람이 네가 나를 죽이지 않고서는 이 힘없는 자를 아프게 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날, 하늘나라는 이미 이 땅에 있다.” 피에르 신부의 말처럼 그리스도인은 가운데 서야 하는 사람이다. 가장 힘센 자와 가장 힘없는 자 사이에 서야 하는 사람, 경계를 만들어야 하는 사람, 스스로 경계가 되어야 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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