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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기독교>기획 -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이유로 직업을 가져야 하는가?"(3)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이유로 직업을 가져야 하는가? (3)


송인규 <주간기독교> 『2010호』


그리스도인들이 일을 해야(혹은 직업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i) 성경의 가르침을 좇기 때문에, (ii) 하나님의 모습을 반영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셋째,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서 일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하나님 사랑을 제외하고는 최고의 계명이다 (마 22:37~40). 이제는 어떻게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만 남는다. 베드로는 이에 대해 중요한 빛을 던져 준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만일 어떤 집단의 사람들이 서로 봉사하려면(섬기려면) 각자가 받은 은사를 활용함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자면, 은사가 없이는 다른 이를 섬길 수 없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또, 베드로는 상기 구절에서 믿음의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권면한 것이지만, “서로”가 지칭하는 대상들은 이 세상 사람들까지 확대될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에게 허락된 은사와 재능을 통해서 이웃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반대로 은사나 재능이 없으면 이웃을 섬긴다는 것이 하나의 공염불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점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25~37)에서도 얼마든지 확인될 수 있는 바이다. 성경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자신의 생활 상황에 있어서 분명 강도 만난 이웃을 사랑했고 그 이웃을 섬긴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런데 그는 인간의 필요와 충족이라는 사회적 연계성과 전혀 무관하게-즉 문화적․환경적 진공 상태 가운데-강도 만난 이웃을 섬긴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기름,” “포도주,” “짐승,” “두 데나리온”(눅 10:34~35)의 자원이 있었고, 응급 처치에 대한 기본 기술이 숙달되어 있었으며, 주막까지의 길에 대한 정보가 확보되어 있었다. 이 사마리아인이 불행 당한 이웃을 돕고 싶은 마음만은 굴뚝 같았어도 만일 이러한 자원과 기술과 정보가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면, 실제적 사랑과 섬김은 “물 건너 간” 일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누군가를 돕고 섬기고자 한다면 우리에게 갖추어져야 할 바가 있는데, 이것이 일반 사회 생활과 관련해서는 은사/재능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은사나 재능과 직업 활동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의 직업은 우리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 즉 우리의 은사나 재능과 연계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는 재능/은사 → 직업 활동 → 이웃을 섬김 이라는 도식이 형성되는 셈이다. 



종교 개혁 당시 루터는 또한 이와 비슷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다. 루터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삶의 위치(station in life)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삶의 위치를 하나님의 소명(vocation)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전 7:17~24)고 설명했다. 삶의 위치란 우리가 가정이나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견지하는 관계나 역할[집권자-백성, 남편-아내, 부모-자녀, 교수-학생 등], 또는 공적으로 확인되고 인정되는 직업 상의 신분[학생, 연구원, 회사원, 정치인, 기업가, 가수, 운동 선수, 국어 교사, 배관공, 은행 지점장 등]을 총망라하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그런데 이웃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삶의 위치를 통해 이루어진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부여 받은 여러 가지 관계와 사회적 신분을 통해 우리의 임무를 다함으로써, 우리는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어머니는 책임성 있게 자녀를 돌보고, 위정자는 국민의 복지와 안녕을 위해 자신의 권세를 행사하며, 교사는 학생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다양한 책임을 성실히 감당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명한 바 이웃 사랑을 실천해 나간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렇듯 자신의 직업에 충실함으로써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게 된다. 





물론 삶의 위치를 근간으로 한 루터의 소명론은 근대 이후의 사회적 정황과 맞지 않아 비판을 받아 왔다: “… 루터의 시대 직후부터 유럽의 문명 세계는 시장 경제, 가속화된 도시화 현상, 기술의 쇄신 및 광범위한 정치적 재구성 등 복합적 영향력으로 인해 극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다”[Lee Hardy, The Fabric of This World (Grand Rapids, Michigan: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0), p. 65].


 만일 루터가 주장하는 삶의 위치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노예 제도, 여성 압제, 인종 차별 등도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편에서는 무척 조심해야 한다. 따라서 본인은 삶의 위치 → 직업 활동  이웃을 섬김 이라는 루터 식의 도식을 바꾸어 “삶의 위치” 대신 “개인의 재능과 은사”를 핵심점으로 강조한 것이다. 이렇게 재능/은사   직업 활동  이웃을 섬김 이라는 변화를 인정한다면, 루터의 소명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가르침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4)편에서 계속됩니다>


출처: <주간 기독교> 기획 - 그리스도인의 일과 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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