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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심1월호 영혼의 창] 시심백일장 - 빨간 립스틱을 바르며 (조현자, 최우수)

빨간 립스틱을 바르며 (조현자, 최우수)








오 랜만에 외출할 일이 있어서 세수를 하고 화장대 앞에 앉았습니다. 육십에 가까워진 나이 때문인지 밖에 내리고 있는 장맛비 때문인지 얼굴이 칙칙해 보입니다. 이것저것 바르고 나서 좀 화사해 보이라고 얼마 전에 산 빨간색 립스틱을 발랐습니다. 바르고 나니 빨간색 덕분에 얼굴도 한결 젊어 보여서 “이만하면 아직 괜찮은 얼굴이네.”라고 혼잣말을 하며 어깨를 으쓱 올려봅니다. 덩달아 기분도 좋아집니다.



그런데 화장대 위에 낯선 립스틱 하나가 눈에 띕니다. ‘누구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내 것이라는 기억이 없습니다. 많지 않은 립스틱 중 하나는 지인에게 선물로 받은, 제법 가격이 나가는 것이어서 아끼고 있는 것이고, 하나는 거울이 달려있어 쓰기 편하기 때문에 외출할 때 가방 속에 챙겨 넣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막내딸과 함께 화장품 가게에 갔을 때 색이 마음에 든다고 했더니 딸이 선물로 사준 것, 곧 지금 바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웬 것이지?’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곰곰 생각해보니 언젠가 작은딸이 색이 잘 맞지 않는다며, 엄마한테 맞을 것 같다고 하면서 놓고 간 것 같았습니다. 무심코 받은 립스틱이라서 기억이 잘 나지 않았나 봅니다.





학창시절에는 어른들이 책을 읽고 나서 책 내용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던가, 영화를 보고 나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했습니다. 엄마가 평소에 사용하던 물건들을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다며 찾을 때는 좀 짜증이 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건 몰라도 기억력만큼은 자신 있던 내가 이제는 이해가 됩니다. 나 역시 나이 탓인지 기억력의 한계가 오면서 쉬 잊어버리는 것들이 많아졌고, 스스로도 깜짝 놀랄 정도로 전혀 기억에 없는 것들도 생겨났습니다. 며칠 전만 해도, 이웃집 대문 앞에 넝쿨째 늘어진 주황색의 꽃 이름이 갑자기 생각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알고 있었던 꽃 이름 인데 같이 걸어가던 딸아이가 “엄마, 저 꽃 이름이 무엇이죠?” 라고 물어보니 그만 머리가 멍해지며 생각이 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인터넷을 검색해보았습니다. 바로 능소화입니다. 이름도 참 예쁘다고 해놓고는 그만 잊어버린 것입니다. 





립스틱을 바르며 깨닫습니다. 기억력이 없어지는 것은 나이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내 마음의 태도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행동이든, 어떤 물건이든, 그리고 어떤 사람이든 마음을 주었을 때는 쉽게 잊히지 않는데, 무심코 지나쳤던 일상이나 사람들은 기억 속에 남아있지를 않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연한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좀 더 의미 있는 시간, 의미 있는 말들, 의미 있는 행동들을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순간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지금 내가 발 딛고 있는 터전이 얼마나 감사한지 마음을 줘야겠습니다. 그래서 눈 속에 담아두고, 머릿속에 기억하고, 가슴속에 머물게 해서 내 삶이 이어지는 동안 설렘으로, 그리고 감사함으로 종종 꺼내봐야겠습니다. 




지금 거실 창밖에는 장맛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빗줄기 한 아름 거두어, 기억의 창고에 창조주의 선물로 잘 걸어둬야겠습니다. 그래서 훗날 행여 내 영혼에 곤고한 날이 올라치면 창고 문 활짝 열어 한 줄기 꺼내다가 시원하게 세수하고, 지금 이 시간 빨간 립스틱을 바르던 날을 기억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