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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도덕과 자연, 역사를 잇다_김상윤

도덕과 자연, 역사를 잇다



[소리]가 학사님들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 끝에 삶의 현장에 직접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전국 방방곳곳에서 하나님나라를 위해 분투하고 계신 학사님들을 찾아 소개하기 위해 찾은 첫 방문지는 부산입니다. 자신이 부름 받은 부산지역에서 가치를 실현하고 있는 부산 '싸나이'들의 현장에 여러분을 모십니다.


<체험, 삶의 현장> (1) 단순과격, 부산IVF! (2) 도덕과 자연, 역사를 잇다 (3) IVF맨들이 일구어낸 ‘희민건설’ 이야기_김원식  (4) 좋은 건 함께할 때 더 좋다!_송민규  (5) 진로와 소명의 디딤돌이 되어주고파_김융동  (6) 카페 ‘그리고(Grigo)’의 여정_정홍원




도덕교육 연구자로서


1999년 가을, 한국인발달학회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21세기 우리나라 교육의 방향을 정하는 데 참고가 될 만한 논문을 발표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왜 하필 나를 지목했느냐 물으니, 그동안 내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도덕연구를 가장 많이 했다는 것이다. 사실 내가 서울대학교 박물관에서 발표한 논문의 결론은, 안 되는 도덕성보다 창의성에 주목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는데 말이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선생님께 매를 맞은 적이 있었다. 그때 맞은 매가 너무 억울해서 학교를 그만두었다. 검정고시를 거쳐 교육대학에 겨우 입학했다. 그런데 시험시간에 학우들이 아예 대놓고 커닝을 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꽤 충격을 받았다. 페스탈로치처럼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예비교사들이, 성적을 잘 받아서 부유한 학군에 배정받으려고 양심을 속이는 모습을 보고 좌절했다. 연구비를 지원받아 도덕 연구를 하는 학교의 교정은 깨끗한지 몰라도 학교 밖 문방구 앞에는 쓰레기가 잔뜩 쌓여있었다. 기가 막혔다. 어떤 유치원에서 거짓말 검사를 했다. 눈을 감고 8개의 동그라미 한 가운데 차례로 점을 찍도록 하는 실험이었다. 그러나 30명 중에서 단 1명만이 정직하게 눈을 감고 검사를 받았다. 나는 이런 현실을 보면서 우리가 이렇게 어릴 때부터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아이들을 연구하고 지도하는 교수로서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어렸을 적부터 부모의 지나친 기대와 친구들 간의 경쟁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연은 아이들의 도덕 선생




대학 때, 친구들이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할 때 나는 시험과는 관계없는 페스탈로치 선생님의 책을 찾아 읽었다. ‘참 교육’이 뭔지 정말 궁금했다. 그중에 이상하게 이해되지 않는 구절이 있었다. “도덕은 도덕시간에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 이 말은 결국 내가 지금까지 도덕교육을 연구하게 된 동기가 되었는데 그 참뜻을 최근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칸트나, 피아제 그리고 콜버거와 같은 학자들을 공부하면서 배우지 못했던 가르침을 요나스라는 생태윤리학자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이제 도덕의 대상이 인간에서 자연으로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즉, 텃밭을 가꾸는 실과시간에도 도덕을 가르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도덕의 문제를 인간에만 제한했기에 오히려 도덕문제가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자연이 아이들에게 정직함을 가르칠 수 있는 좋은 선생이라고 생각했다. 자연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아이들이 생득적으로 재미있게 공부하도록 돕는다. 그것은 어떤 누구의 칭찬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발적 동기는 어른이 되어서도 주어진 일에 끝까지 재미있게 집중하게 한다.


우리는 흔히 주입식으로 엄하게 기르면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아동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민주적으로 기른 아이들은 생각하는 것이 어른스럽고 혼자서 일을 해낼 수 있는데, 그 혼자됨의 절정은 ‘아이를 자연 속에 내버려두는 것’이다. 자연 속에 들어가면 위험하고 아쉬운 것도 있지만 재미있는 것이 훨씬 많다. 요즘 아이들은 사자나 호랑이, 코끼리, 공룡 등은 좋아하면서, 지렁이나 거미나 심지어 나비를 보고 놀라서 우는 아이가 있다. 이 얼마나 엉터리 가짜교육의 결과인가? 자연 속에서 호랑이를 만나면 굉장히 위험한데도 말이다. 



작은 벌레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이웃을 어떻게 사랑할까? 주일학교 교육에도 엉터리가 많다. 비현실적인 가르침을 주입식으로 하다 보면 아이들이 교회 나가기를 싫어하게 된다. 도덕교육은 인간에 대한 사랑보다 자연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자연 속에서 아이들은 작은 개미 한 마리의 움직임을 뚫어져라 보고 벌 한 마리가 꽃송이 속에 들어가 무엇을 하는지 관찰하느라 시간가는 줄 모른다. 교실이나 집에서는 산만하고 떠들기만 하던 아이들이 그렇게 얌전할 수가 없다.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를 가만히 손으로 잡아본다. 그러다가 차츰 용기가 나면 따듯한 논물 속에 헤엄쳐 다니는 올챙이를 따라다니다가 마침내 두 손으로 물과 함께 담아 올리기도 한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경쟁이나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이 용기와 호기심을 길러나가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고 난 다음부터 나는 도덕연구는 포기하고 아이들을 시골에 데리고 가는 캠프를 시작하였다. 석사학위를 받은 해에 낳은 아들을 석양이라 이름 지었고 농장 이름도 석양농장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여름과 겨울방학, 그 다음에는 봄나물캠프, 가을파브르곤충학교 등 부지런히 아이들을 데리고 시골에 갔다. 



자연예찬


교사나 부모가 아무리 눈높이에 맞추어 가르쳐 준다고 해도 아이들은 어른들이 일부러 그러는 줄 다 알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언제나 을의 위치만 배울 뿐이다. 그러나 자기보다 힘이 훨씬 약하고 크기도 작고 지식도 부족한 벌레들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갑의 입장에 놓이게 되고 책임감(responsibility: 반응할 수 있는 감수성)을 수행할 경험을 가지게 된다. 이처럼 자연체험은 교사와 부모와의 수직적인 인간관계의 부담으로부터 벗어나 아주 작은 벌레들 앞에서 주인의식을 느끼기도 한다. 작은 벌레 한 마리도 요나스가 말하는 ‘살려고 애쓰는 존재’로, 크기는 비록 작지만 나름대로 전체적인 삶과 생명을 다하는 존재로 대하게 된다. 그리하여 위기와 죽음, 도움과 파괴 등의 추상적인 개념을 배울 수 있다. 



작은 생물체들의 움직임에 민감한 아동들에게 생명에 대한 공감능력과 친근감을 갖게 해주는 어릴 때의 체험은 그리움이라는 좋은 감정을 동반한다. 따라서 세상에 대한 첫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형성되어 어른이 되어도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해준다. 그뿐만 아니라 다양한 감각적 체험에 생득적으로 준비되어 있는 아동들에게 감각의 계열성, 예컨대 쓴맛 다음에 단맛을 가르침으로써 모든 감각의 소중함을 알게 해준다. 추위나 굶주림 또는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도 어른에 비해 강한 그들을 생태계에 직접 노출시켜 주어서 이런 것을 극복할 경험을 해주는 게 좋다. 그러면 장차 어른이 되어서도 어려움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빠르게 변하는 문화에 비해 자연은 시대가 변화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고 세계 어느 곳이나 공통점이 많기 때문에 어릴 때의 풍부한 자연체험은 세대차이나 문화차이를 극복하게 해준다. 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한 애착심을 갖게 해줌으로써 자연생태계가 파괴되는 일에 저항하며 이를 보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는 동기를 마련해준다. 



은퇴 후를 미리 생각하다



예전에 부산지역 IVF 이영준 전(前)이사장님이 정년이 되어 이사장직에서 물러나실 때, 20년 전부터 미리 다음 할 일을 준비하는 것이 지혜라고 말씀하시던 기억이 났다. 나는 선배님의 가르침을 따라 미리 정년 후에 할 일을 준비해왔다. 그 중에 하나가 ‘풍차와 연못 보급하기’이다. 이 주제로 논문을 쓰기도 하고 유치원들을 찾아다니며 연구비를 받아 풍차와 연못을 만들어 주는 일도 하였다. 올해는 ‘꽃밭 만들기’도 시도해보았다. 인터넷으로 구입하여 심은 씨앗들도 절반 정도는 실패로 끝났지만 생각지도 않게 키다리 수수가 멋지게 늦은 여름을 장식해주어서 다른 실패들의 슬픔을 잊게 만들었다. 어제는 6세반 어린이들이 석양농장을 찾아왔다. 늦여름 자연 속에서 땀으로 젖은 아이들의 얼굴에 활짝 핀 미소를 보면서 내가 이제 할 일이 바로 이거로구나 하는 확신을 가졌다. 



경명학교 이야기


폐가의 발견된 고문서들 중 이령교회 초대교인들의 명부

이렇게 아이들과 함께 근 20년 넘게 캠프를 하다가, 인근에 있는 삼촌의 폐가를 고쳐서 캠프장으로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창고의 쓰레기더미 속에서 고문서를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그 속에는 1904년에 우리 할아버지께서 교장으로 계셨다는 경명학교 이야기도 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 학교가 1919년 3월 9일에 경남부산지역에서는 가장 먼저 삼일만세운동을 불렀다는 자랑스러운 사실도 국사편차위원장 이만열 교수로부터 인증을 받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할아버지 김세민 장로님이 손양원 목사님의 아버지 손종일 장로님과 형제처럼 지낸 사실을 우리 학교를 방문하신 손양원 목사님의 따님 손동희 권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알게 되었다. 석양농장에서 경명학교로의 확장은 도덕교육에서 자연교육으로 그리고 복음의 역사교육으로 발전을 의미한다. 이제 후년이면 나도 은퇴를 하게 된다. 말년에 갑자기 부총장을 맡게 되어 이제 1년을 일했는데 남은 1년이 너무 길게 느껴진다. 아마도 내 앞을 기다리고 있는 이루어야 할 꿈들 덕분에 내 마음이 밤낮으로 설레기 때문이리라. 도덕과 자연과 역사를 이어주는 내 평생의 꿈 말이다.



경명학교 재(再)개교 이후 여름에 성경학교를 하는 모습








김상윤│부산교대71, 부산지방회 이사장
부산교대 졸업 이후 동아대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으며, 경북대에서 교육학 석사과정을, 동아대에서 교육학 박사과정을 이수했다. 고신대 이동학과와 유아교육과 교수로 역임했으며 교육대학원장을 거쳐 현재는 고신대 부총장을 맡고 있다. 또한 부산지방회 이사장과 '부산생명의전화', '한국독서문화재단'의 이사직을 겸임하고 있다.





















vol.217=2014.12+2015.01

체험, 삶의 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