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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_<리멤버0416> MBC팀 좌담회 (1)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년이 지났습니다. 유가족의 육성을 담은 《금요일에 돌아오렴》이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더군요. “슬픔이 아니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집 밖을 나갈 수도, 집 안에만 있을 수도 없는 시간, 아이의 물건을 태울 수도 그대로 둘 수도 없는 시간, 밥을 먹을 수도 안 먹을 수도 없는 시간...” 


많은 분들이 지난 1년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보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 시간 동안 사회 시스템의 총체적 부실을 확인해야 했고, 상처 난 마음에 대못을 박는 세상 사람들의 비정함을 지켜보고야 말았습니다. 


압니다. 삶이 불행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하지만 불행을 겪는 사람들이 그 아픔을 적게 겪게끔 옆자리를 지키는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여기, 전전긍긍하면서도 유가족의 마음으로 믿음의 자리를 지킨 학사들의 이야기를 싣습니다. 우리가 함께여서 참 다행입니다.


“혼자였다면 어딘가쯤에서 이 시간을 닫아버렸을지도 모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시간을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시간으로 바꾸며 사람의 시간을 여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어야 한다.”  -《금요일에 돌아오렴》 풀어쓰는 사건기록 중에서.


《세월호, 1년의 기록》  4․16 이후 파괴된 일상을 살아가는 법_김병년  세월호, 고통을 배우고 애통하는 자들과 연대하다_고성지 ◆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_<리멤버0416> MBC팀 좌담회




참석자강영희, 권경욱, 기숙영, 박종숙

진행 및 정리김경아



김경아(이하 김) [소리] 4월호 발행 시점이 ‘세월호’ 참사 1주기입니다. 지난 1년 동안 여러모로 가만히 있지 않았던 네 분을 한자리에 모셨습니다. <리멤버0416>이라는 그룹에서 MBC 앞 일인시위를 맡고 계시죠. 먼저 희생자들과 9명의 실종자를 위한 기도를 하겠습니다. (기도) 네 분, 자기소개를 부탁합니다. 


강영희(이하 강) 서강대 83학번으로 딸 셋과 남편, 시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어요. 교사였다가 2008년에 퇴직하고 아이들 홈스쿨링을 하고 있습니다. 


박종숙(이하 박) 인하대 91학번으로 네 명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위로 두 아이는 홈스쿨링 중이고, 셋째는 사실 어제부터 학교에 갔어요. 막내는 유치원생이죠. 제대로 홈스쿨링을 하려면 손이 많이 가야 하는데, 손이 닿는 걸 싫어하는 나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웃음)


기숙영(이하 기) 저는 IVF 학사는 아니지만 지인 중에 IVFer가 많아요. 나들목교회에 있고 세 명의 아이를 두었어요. 남편이 목사여서 사모라 불리나 그렇게 불리는 걸 싫어합니다. (웃음) 교회에서 타문화 변혁사역을 맡고 있어요.


권경욱(이하 권) 서강대 04학번으로 희년선교회에서 외국인 근로자와 다문화가정을 돕는 간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만 싱글이군요. (웃음)


김  네, 감사합니다. 본격적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그간 우리나라에 수많은 재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유독 세월호가 여러분을 움직이게 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왜 하필 세월호일까요?


강영희

강  어떤 사건사고와 관련해서, 내 일이라 생각하고 이렇게 긴 시간 활동해 보기는 처음입니다. 이 참사에는 SNS의 역할이 컸던 것 같아요. SNS를 통해 현장의 정보를 꾸준히 접할 수 있었고, 유가족의 증언을 실시간으로 들었고, 아이들이 수장되는 모든 과정을 생중계로 지켜봤잖아요.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생생하게 듣고 볼 수 있었다는 점이 이 사건을 특별하게 보게 된 한 가지 이유인 것 같아요. 또 단원고 아이들이 우리 아이들 또래여서 더 충격적이었어요. 엄마의 심정으로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들었죠. 게다가 저는 전직 교사였잖아요. 그런데 내가 교사라면 저기서 살아 돌아왔을까, 내가 살아 나온 상황에서 아이들을 구하러 다시 들어갔을까, 교사로서 어떻게 했을까, 마음이 너무 힘들었어요. 교사로서, 엄마로서 그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 그것 때문에 이 사건이 더 특별했죠.


기  그때 자식 가진 모든 부모의 마음이 덜컹했을 겁니다. 수학여행 길에 오른 아이들이 한꺼번에 사고를 당했으니까요. 게다가 세월호 사건만큼 엄청난 사건이면서 언론보도가 제각각인 적도 없지 않았나요? 그래서 더 관심이 생겼어요.


김  인터넷의 발달로 어떤 언론이 왜곡보도를 하는지 바로 알아챌 수가 있었죠. 


권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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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맞아요. 게다가 진실 여부를 떠나서 우리 모두가 세월호가 침몰하는 상황 그 자체를 볼 수 있었어요. 다른 대형 사건사고는 전부를 다 보진 못했거든요. 세월호 사건은 아이들이 살아있는 걸 보고 알고 있었는데 한 명도 구하지 못한 거예요. 보면서도 내가 못 구했다는 느낌을 받았으니까요


권  세월호가 침몰한 이후 과정들이 한국 사회를 날것 그대로 드러낸 것 같았어요. 구조부터 시작해서 사고를 처리하고 보도를 하고 책임을 지는, 일련의 과정이 전부 엉성했습니다. 문제가 밝혀지지도 않았는데 정부쪽에서는 오히려 덮어버리려는 움직임까지 보였죠. 게다가 참사 후 6월에 선거가 있었는데, 참사에 대해 사람들이 느낀 아픔이나 정부에 대한 실망이 선거에서 전혀 드러나지 않았어요. 개인적으로 거기서 무력감을 느꼈어요. 이 사건이 그대로 덮이겠다는 위기감마저 들었습니다. 뭔가 해야 하지 않겠나 싶었죠. 선거라는 제도로도 해결되지 않으니 시민으로서 움직여야겠다는 책임감이 자발적으로 생겼어요. 그때 피케팅 자원자를 모집하는 글을 읽고 일인시위에 합류했어요. 세월호는, 어느 정도 경제도 성장했고 민주화도 이뤘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한국 사회가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과제들을 명백히 드러낸 것입니다. 


김  피케팅 이전에는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처음 안산 합동분향소에 가서 아이들의 영정 앞에서 울던 날, 생존학생들이 친구들을 분향하러 왔더군요. 가슴이 찢어졌어요. 그때 우리 모두가 그랬듯이 일상을 사는 것도,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힘들었어요. 전직교사로서, 세 아이의 엄마로서 이후에 내가 뭘 할 것이지 스스로 계속 질문했어요. 그때 두 가지 이야기가 마음에 남았습니다. 하나는 황병구 한빛누리 본부장님의 말이었는데, 분노가 우리를 향하면 안 된다는 거였어요. 당시 저는 “내 탓이오”라며 스스로 돌아보던 중이었는데, 분노는 진범을 향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또 정혜신 박사님이 슬픔 속으로 더 적극 들어가는 것이 슬픔을 이겨내는 힘이라고 하셨어요. 이 두 가지를 지금까지 기본원칙으로 삼고 있어요. 5월의 어느 날, 팽목항에 갔습니다. 그날의 경험이 지금까지 나를 멈추지 않게 했다는 걸 요즘에 깨달았어요. 엄마들이 통곡하는 슬픔의 현장에서 비구니 스님 한 분이 아이 보낼 때 기도해도 되냐고 양해를 구하고 기도를 하시더군요. 가톨릭 신자들은 시신을 닦아드리는 봉사도 하셨고요. 그분들을 보며 개신교 그리스도인으로서 도전이 된다고 하니 저를 안아주며 격려해 주셨어요. 종교와 상관없이 서로 수고했다며 격려하는 모습, 각자의 종교가 드러나면서도 유가족에게 위로가 되는 모습을 그곳에서 보았습니다. 의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계시던 아버지들이 신부님 앞에서 통곡하는 것도 보았어요. 현정에서 위로자 역할을 하는 불교와 가톨릭의 모습을 보며 개신교인인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하게 되었죠.


김  팽목에서 돌아온 후엔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이미 광화문에서 일인시위를 하고 있던 오지숙 씨의 활동을 계속 지켜보던 중이었어요. 그분이 하루 4시간씩 밥도 못 먹고 일인시위를 하는 걸 보면서, 점심이라도 먹게 해주자고 점심시간 교대 팀을 짰어요. 그렇게 8명이 모였는데 그중 7명이 그리스도인이었어요. 성령님이 이끄신 것이라고 믿어요. 그후 <시사인> 좌담회 덕분에 <리멤버0416>이라는 이름이 생겼고 여기까지 이어진 겁니다. 광화문에서 일인시위를 하며 기도했어요. 그야말로 ‘광화문 기도실’이었어요. 고통 받는 유가족을 위해, 실종자를 위해, 진상조사를 위해 공의의 하나님이 역사하시라고 기도했죠. 그런데 그 자리에 유가족 텐트가 들어서는 걸 보며 소름이 끼쳤어요. 하나님이 저분들을 위해 미리 광화문에서 기도하게 하셨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김  다른 분들은 MBC 앞에서 피케팅을 하기 전까지 어떤 시간을 보내셨나요?


권  저는 월요일 저녁마다 기독인모임 기도회에 가서 동참하는 정도였죠. 


강  MBC를 겨냥하여 일인시위를 시작하게 된 이유가 있어요. MBC는 사고 초기부터 ‘단원고 학생 전원구조’라는 오보를 내지 않나, 보험금을 따지는 보도, 민간 잠수사의 죽음을 유가족의 조급증 탓으로 모는 보도 등 그야말로 ‘보도 참사’를 선보였어요. 그러다가 “광화문 광장이 세월호 유가족으로 인해 난장판이다”라는 뉴스데스크를 보고 항의하는 의미로 일인시위를 시작한 거예요. 피케팅 팀을 모집했을 때 일주일 안에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 자원하신 거죠.


기숙영

기  다들 기억하실 텐데, 세월호 사건이 공교롭게도 부활절 즈음에 일어났습니다. 부활절 한 주 전, 교회 주일예배 설교 내용이 아픈 세상에 대한 것이었어요. 우리 교회는 설교 전에 주제와 관련한 퍼포먼스를 하는데요, 사회폭력에 대한 연극이 강렬하게 마음에 남은 상태였습니다. 그날 예배 후 하나님에게 짜증을 냈어요. 하나님이 살아계신데 이 세상이 왜 이러냐고요. 신앙에 회의가 들 정도였죠. 겨우 겨우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글쎄, 수요일에 사고가 난 거죠. 신앙생활을 하며 그때처럼 하나님을 원망한 적이 없었어요. 그날 저녁부터 매일 교회에 가서 울었어요. 아이들이 물에 잠기는 걸 눈앞에서 봤는데 도대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냥 눈물이 줄줄 흘렀어요. 그러다가 중요한 시험을 준비하던 언니가 갑자기 진도에 가자고 했어요. 여자 둘이 운전해서 팽목항과 진도체육관에 가보고 왔어요. 뭘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갔어요. 실제로 가서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급박한 상황은 지난 상태였죠. 팽목항은 예상과 달리 너무 조용했어요. 오히려 그런 조용함이 더욱 슬펐어요. 팽목항에서 돌아와서도 여전히 무기력하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지내다가, 페이스북에서 광화문에서 한 시간씩이라도 피케팅 할 사람을 모집하는 걸 보고 자원했어요. 그때는 뭐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으니까요. 이후 광화문에 여러 천막들이 세워지며 북적이고 MBC팀을 모집한다고 해서 자원하게 된 거죠.


박종숙

박  저는 세월호 사건 이후 악몽을 굉장히 많이 꿨습니다. 아이들이 겪었을 공포가 날마다 저를 짓눌렀어요. 그래서 일부러 더 세월호를 밀어냈습니다. 제가 너무 괴로웠으니까요. 그런데 해결되는 건 없고 점점 미궁으로 빠지는 소식들이 들려왔어요. 그래서 그저 같이 있어주고 싶다는 마음을 나누고 싶어서 주말이면 광장으로 나갔지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참여할 수 있는 장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세월호 기독인 기도회 소식을 들었고, 그거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기도회에 꾸준히 참여했어요. 교회 차원에서 광화문 천막 단식도 함께했고요. 기도가 가장 큰 힘이라는 건 알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웠어요. 잠깐 기도하고 끝나서 흩어지는 게 어떤 변화를 일으킬까, 간절히 기도했으나 뭔가 직접적인 행동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남편에게 뭔가 했으면 좋겠다고, 가만히 있는 게 오히려 힘들다고 이야기했더니 이 팀을 소개해 주었어요. 


김  여러분 모두 가만히 있기를 거부하신 분들이네요. 그렇다면 세월호가 여러분 각자의 삶을 어떻게 바꿨다고 생각하시나요? 여러분의 일상생활, 인격, 신앙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얻은 것과 잃은 것까지 이야기해 보죠. 


강  저는 살면서 나름대로 늘 교육의 영역에서 하나님나라 운동을 해왔다고 생각해요. 교사로서나 엄마로서 다음세대를 위한 교육을 고민했죠. 그런데 돌아보면 대부분 기독인 단체 내에서 움직였어요. 우리 공동체만을 챙기기 위한 건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우리끼리의 운동이 되기도 했어요. 사실 지금의 활동이 저는 낯설어요. 어떨 때는 외국으로 도망가면 그만둘 수 있을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웃음) 세상 속에서 하나님나라 운동을 하라고 배우긴 했지만 솔직히 우리끼리 있는 것이 익숙했어요. 배운 건 그게 아니나 의도하지 않게 그렇게 된 거죠.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는 이 일이 처음이에요. 의지적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보니 부르심이었습니다. 그 부르심에 순종하면서 가고 있어요.


김  비그리스도인과 연대한 경험은 어떠셨나요?


 교사였을 때도 비그리스도인과 함께 일해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세상과 연대한 건 처음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저의 삶을 지켜보고 있어요. 그런데 신부님이나 수녀님, 스님들은 그들의 정체성과 신앙을 드러내는 옷을 입지만 개신교인은 표면적으로 드러낼 만한 뭔가가 없잖아요. 그래서 저 나름대로 십자가 목걸이를 해요. 그 목걸이를 하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이 일을 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반응이라는 걸 제 자신에게 상기하기 위해서죠. 그 외의 큰 변화로는, 최근에 교회를 옮겼습니다. 한국교회는 언제나 제 첫 번째 기도제목이었어요. 새벽마다 교회를 위해 기도했죠. 어떤 사안에 대해 교회가 나와는 다른 입장을 보였어도 인내를 갖고 견뎠습니다. 그런데 세월호 사건 이후 더 이상 함께 갈 수가 없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20년 이상 다녔던 교회였기에 도망치듯 나오고 싶진 않았어요. 제가 맡은 일을 성실하게 마무리했고, 세월호 유가족과 지금까지 함께했고 끝까지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그곳이 하나님이 나를 불러주신 현장이다, 그러니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사 부탁하고 떠나왔어요. 남편도 저를 사역지로 파송한다는 개념으로 교회를 떠날 수 있게 도와주었고, 하나님의 인도 가운데 지금의 교회로 올 수 있었습니다. 


김  큰 변화를 겪으셨네요.


강  지금 다니는 교회는 보수교단에 속했지만 세월호의 아픔을 품고 기도합니다. 목사님은 축도 때마다 세월호 참사의 날짜를 언급하고 유가족을 위한 기도로 마치세요. 교회 근처 공원에서 피케팅과 서명전도 계획하고 있고요. 교우들은 세월호 관련 물품을 드리면 매주 달고 다니시고, 제가 팽목항 다녀온 후에는 수고했다고 말씀해 주세요. 제게 세월호는 이제 하나의 사역입니다. 영적인 싸움이라 교회가 기도로 지원해 주시길 바랐던 겁니다.  


권  제가 잃은 건 쉬는 시간이에요! 


강  맞아요! 책 읽을 시간이 없어요.


 대신 얻은 것도 있어요. 책이 아니라 몸으로 배운 게 많아요. 어떤 할아버지는 제게 매국노라며 손가락질하시더라고요. 물론 직접적인 격려도 받았죠. 사람들이 각자의 생각에 따라 반응을 하니 바로바로 소통이 되더군요. 이외에도 얻은 게 많아요. 분향소도 한 번 갈 것을 여러 번 갔죠. 바쁜 일상을 살다보면 나에게 갇히고 잊기도 하고 관심도 멀어지는데, 일인시위를 하면서 다시 생각을 하게 되고, 피켓을 들고 기도하다 보면 아픔이 다시 느껴져요.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_<리멤버0416> MBC팀 좌담회 (2)'에서 계속


















vol.219◆2015.04+05

세월호, 1년의 기록